다산 팀스트롱 MMA
여름에 우리는 6주 동안 한국에 다녀왔다. 앞뒤로 2주는 폴란드에 있었다. 판테를 맡기러 폴란드로 가서 한국으로 갔다가 다시 폴란드로 와서 네덜란드로 들어왔다. 3년 전부터 시작된 이 여정으로 우리는 유럽에서의 여행을 거의 포기하게 됐다.
"내년에는 한국에 가지 말고 그 후년에 가자."
"그래, 내년 여름에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한 달 살이를 해보자."
"그러게, 그거 너무 좋다. 니스도 우리 못 간 지 오래됐으니까 니스에서 한 달 살이를 해볼까?"
"진짜, 너무 좋다. 한국 안 가면 가능하지."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우린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쳐, 이런 대화를 나누지만, 4월 즈음이 되면 "한국 가는 표는 언제 사지?" 같은 대화를 다시 나누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우리는 한국에 다녀왔다.
내가 이런저런 일로 바쁜 동안 루이와 라파엘은 운동을 다녔다. 이 둘에게 운동은 정말 중요한데, 루이는 아빠를 따라 유도를 시작했고 주짓수를 몇 년째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아빠가 유도 유단자인가 싶지만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몇 년째 라파엘은 운동에 미쳐있다. 하루에 두 번씩 헬스장에 가고 주짓수 세미나를 쫓아다니고 휴가 가는 곳마다 주짓수 도장에 단기 등록해 다니고 있다. 은퇴 후에 아무래도 체육관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는 주짓수에 진심이다. 그러다 보니 루이도 저절로 아빠의 패턴을 좇는 중이다.
유럽 대부분 나라가 그렇겠지만, 유럽에서는 공부를 잘해도 평생 다룰 악기 하나와 즐길 운동 하나는 배워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네덜란드에서 생존수영은 필수여서 태어나면 거의 바로 수영 수업에 대기를 올리기도 한다. 우린 늦게 올려서 루이는 이제 수영을 배우고 있다.
술리의 사고 이후 루이는 물공포증이 생겼고 이로 인해 잠깐 동안 물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했었다. 나는 루이와 함께 물놀이를 다니며 이를 극복하려 애썼다.
수영 수업 중에는 선생님이 계시니 빠지지 않게 도와줄 거라고, 그래서 어른들이 있는 거라는 아이를 안심시켰다. 얼마 후, 루이는 마음을 다잡고 얼굴을 물에 담갔다. 숨을 참고 앞으로 나아갔고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걸 알자 수영은 빠르게 늘었다. 사실, 힘이 좋아 숨도 안 쉬고 힘으로 앞으로 쭉쭉 뻗어나간다.
남자아이들은 대게 축구를 먼저 시작하는 것 같다. 이것도 경쟁이 심해서 1, 2년 전부터 대기에 걸어 놔야 한다. 우리는 집에서 가까운 클럽 몇 곳에 연락을 넣고 루이를 대기자 명단에 올렸지만, 삼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는 연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도 할 말이 많은데, 네덜란드 클럽들이 다 규모가 작고 비전문적(대부분 본업이 있고 퇴근 후에 코치를 한다)이다 보니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 다들 누군가의 엄마, 아빠이거나 친척 혹은 친구이기 때문에 이방인인 우리가 낄 자리가 없다.
결국 루이는 동네 팀에는 들어가지 못해서 에인트호벤에 PSV에 등록했다. 유아축구를 PSV에서 했는데, 그냥 그걸 이어서 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아이들 축구 수업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축구를 한다. 이게 봄이나 초여름에는 견딜만한데, 겨울에는 축구하는 아이도, 기다리는 부모도 죽을 맛이다. 그래서 이 년 정도 하다가 지난겨울에 일단 멈추기로 했다.
루이를 축구 클럽에 보내면서 유럽인들이 축구에 정말 진심이라는 걸 느꼈는데, 루이와 함께하던 한 친구는 PSV 축구를 하기 위해 개인 레슨을 받는다고 했다. 결국 그 아이는 PSV 탤런트로 뽑혀서 나갔다.
루이는 축구에 딱히 재능이 없었다. 그냥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엄마, 엄마. 방금 봤어? 공이 내 발에 닿았어!" 하며 기뻐하던 아이였으니 말해 뭐 할까.
그리고 이런 말을 거기 있는 모두가 듣게 큰소리로 하는 아이였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부모의 몫이었다. 라파엘도 나도 그렇게 마냥 해맑은 타입은 아닌데, 루이는 엄청나게 밝은 에너지의 아이다.
어떻게 이렇게 마냥 행복한 아이가 나 같은 사람에게서 나왔을까?
"루이는 해피보이야."
보는 사람마다 말할 정도였다. 루이는 그냥 마스코트 같은 아이였다. 축구공이 좋아서 쫓아다니는 아이, 엉뚱하고 잘 웃는 귀염 받는 아이였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잘 모르는데, 모두 루이를 알았고 아이가 너무 재밌고 귀엽다는 말로 스몰토크를 시작하곤 했다.
"루이가 잘하니?"라는 내 질문에 축구 코치는 "Tuurlijk, Louistje heeft natuurlijk talent!-그럼, 타고난 재능이 있어-"라고 농담을 했다. 그건 축구하는 루이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기에 그냥 정말 농담일 뿐이었다. 이 코치는 루이를 항상 Louistje라고 불렀다. 루이는 자기를 작은 아기처럼 부르는 걸 너무 싫어해서 "나는 루이 쪄 아니야!"라고 뾰루뚱한며 삐지곤 했다. 정말 놀라운 건, 루이는 자기가 축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루이는 유도와 BJJ 주짓수를 6 살 때부터 배웠다. 루이가 새로운 걸 배우기 시작할 때,, 내가 선생에게 "루이, 잘하고 있어?"라고 물으면 대부분 "그럼, 루이가 너무 좋아해."나 "애가 에너지가 너무 좋아."같은 말을 들었었다. 루이는 그저 맑고 밝고 귀여운 아이, 아직 뭔가에 재능을 보이기엔 너무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루이의 재능이 유도에서 발휘된 거다. 유도 선생은 루이를 보며 감탄했고 우리를 따로 불러 루이가 유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으로 아이가 뭔가에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무척 기뻤는데, 그러면서 또 걱정이 됐다. 운동을 전문적으로 시키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게 부모의 마음인 걸까. 잘해도 걱정, 못 해도 걱정인....
어쨌든 한국에서는 라파엘이 주로 루이를 돌보기 때문에, 한국에 갈 때마다 루이는 어른들과 함께 주짓수를 배웠다. 2024년에는 박정은 코치(그녀는 로드 FC 파이터다)가 루이를 가르쳤다. 당시에는 아이들 반이 없어서 루이는 어른들과 함께 주짓수를 배웠다. 루이가 어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작년처럼 적극적으로 이번에는 주짓수를 배우지 못했다. 그때는 한국에 클럽 이름이 팀스트롱 울프였는데, 그 후에 루이는 자기도 울프라고 말하곤 했다. 지금은 팀스트롱(여긴 현직 선수들이 수업을 한다)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루이는 암바(arm-bar) 거는 거에 미쳐있었는데, 누구의 팔이든 팔이기만 하면 잡고는 암바를 걸었다. 정은 코치가 루이에게 '루이스암바드'라는 애칭을 주기도 했다.
"진정한 스포츠맨은 매트 밖에서 기술을 걸지 않아."
나는 루이가 유도를 배운 후로 항상 말하곤 했다.
혹시 학교에서 엄한 아이를 엎어치기라도 할까 봐 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루이가 학교에서 따귀를 맞고 왔고 이는 충격이었다. 누군가 때리면 바로 선생에게 달려가라고 일러왔지만, 아이가 한 대라도 때리고 도망가길 바라는 게 엄마 마음인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루이가 학교에서 맞고 왔다는 이야기를 한국에 친구에게 한 적이 있는데, 이 친구는 자기가 어릴 때 학교에서 친구를 때린 적이 있다고 했다. 그의 엄마가 친구 집에 가서 사과하고 와서 자신의 볼에 뽀뽀했다고 하며 "경상도 엄마들은 뽀뽀 같은 거 안 한다!"라고 말했다.
친구 엄마의 행동이 너무 이해가 됐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나는 아이를 현명하고 건강하게 키우고 싶었는데, 사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이기적인 엄마가 되고 있었다. 예수의 사랑으로 인류애를 발휘하기보다 구약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현실성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이 있는 법이니까.
"왜 맞고만 있었어!"
루이가 맞았을 때, 내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이다. 나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현명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루이에게 유도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넘어지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는데, 루이가 맞고 왔을 때, 나는 왜 엎어치기 기술을 쓰지 않았냐고 먼저 물었다. 요즘은 거의 다 포기 단계라, 그냥 "쟤랑 놀지 마!"라고 간단히 말해버린다. 뭐 너무 인간적이지 않은 가.
이제 더는 루이가 마냥 철없고 밝은 댕댕이 같은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맞았을 때 자신의 대처에 대해 내내 곱씹는 것도 같았다. 본인이 배운 운동이 자신을 지킬 수 없을지 모른다는 한계를 느낀 것 같았다.
"엄마, 나는 그 아이들에게 반격할 수 없었어."
둘이 걷는데, 루이가 말했다. 엎어치기를 할 세도 없이 아이들은 루이를 잡고 따귀를 때리고 도망갔다고. 그 아이의 팔을 잡고 바닥에 눕히고 기술을 걸 새도 없이, 그 아이들은 도망갔다고.
"나는 유도랑 주짓수를 하는 게 좋지만, 다른 뭔가를 더 배워야 할 것 같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얼굴에 났던 손자국은 사라졌지만 루이의 마음은 여전히 그날에 있었다.
우리는 루이가 MMA를 배우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라파엘과 루이가 주짓수를 배우는 곳은 MMA도 가리키는 곳이다. 사실 팀스트롱은 MMA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곳이다. 루이는 MMA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룹 PT였는데, 그 시간대에 나오는 아이들이 없어(한국은 아직 방학 전이었다) 거의 루이 혼자 배웠다. 따귀를 맞았던 기억 때문인지 루이는 얼굴로 향하는 주먹에 겁을 먼저 먹었다. 주먹이 다가오면 눈을 찔끔 먼저 감아버렸다. 그곳에 코치들은 루이에게 갑작스러운 공격에 방어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와 동시에 루이가 겪은 일이 루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일러줬다. 신뢰가 쌓인 관계에서 부모가 아닌 타인이 그런 이야기를 해준 게 루이에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이제 괜찮니? 그 아이들 보는 게 아직도 힘드니?"
첫 등교 때 루이에게 물었다.
"안 괜찮아. 하지만 이젠 공격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루이는 어색하게 웃었고 나는 이게 우리의 최선인가 싶어 씁쓸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루이가 조금 더 성장한 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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