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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링구얼 아이의 고충

폴란드 아빠와 한국인 엄마, 네덜란드 이웃

by 명희진

루이가 언어를 습득할 즈음 코로나가 터졌다. 그때 우리는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했고, 도서관에 '봉사자 책 읽기' 프로그램을 신청한 후였다. 총 열 번 수업에 십 유로만 내면 돼서 부담이 없었다.


몇 주 후 은퇴한 간호사가 찾아왔고, 여섯 번의 수업을 함께 했다. 그때 갑자기 코로나가 심각해져 간호사였던 그녀는 병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게 루이가 처음 접한 네덜란드어였다.


처음엔 금방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길어졌다. 라파엘은 재택근무를 시작했고 우리는 언제나 셋이 함께 집에 있게 됐다. 루이는 다른 언어를 말할 새도 없이 영어로 문장을 만들었다.


나는 루이에게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썼고, 라파엘은 루이에게 주로 영어를 썼다. 셋이 함께 있으니 자연스럽게 영어가 우리 집의 기본 언어가 됐다.





네덜란드에서는 보통 네 살부터 학교에 다닌다. 네 살에는 의무는 아니고, 학교에 익숙해지는 시기라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시기다. 우리는 네 살 반부터 루이를 학교에 보냈다. 루이가 진짜 네덜란드 사회에 입성한 순간이었다.


다행이라면 팬데믹 기간 동안 내가 르뱅 대학에서 네덜란드어를 배웠다는 점이다. B1까지 배워 아이들이 하는 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루이의 학교는 ‘크리에이티브 학교’로, 촘촘히 짜인 시간표 대신 큰 틀 안에서 아이가 스스로 순서를 정하는 시스템이었다.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교였고,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루이는 너무 어렸고 네덜란드어를 하나도 몰랐다.


그래도 루이는 친구를 사귀고, 생일 초대도 받고, 플레이 데이트도 했다.

아이들과 놀 때 기본적인 네덜란드어를 쓰는 걸 보면, 나는 그냥 잘 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영어는 문제없었으니까. 한국어를 못하는 것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젠가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나는 한국 엄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더라도 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걸 더 해주는 게 맞다고 믿는, 그런 엄마.

담임에게 루이 발음이 부정확한 것 같다고 말했고, 언어치료를 제안했다. 그러나 선생은 “문제없다”며 갸우뚱하기만 했다.


몇 달이 지나자 학교 선생들이 대거 바뀌었다. 안 그래도 선생이 늘 부족해 문제였는데, 더 부족해졌다. 그러던 중 학교 설립 멤버였던 마리엔느가 유닛 2의 총괄 담임으로 임명됐다.


그 사이 루이는 다섯 살이 넘었고, 우리는 마리엔느와 학부모 면담을 했다. 평가는 충격적이었다.

루이는 수업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지 않고, 선생과 눈을 잘 맞추지 않으며, 말을 알아듣는지 조차 모르겠다는 거였다. 아이가 귀의 기능에 문제가 있느냐는 질문을 마리엔느가 했고 나는 기분이 나빴다. 다행이라면 그전에 한국에서 귀 검사를 다 끝내고 왔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마리엔느는 루이를 다음 유닛으로 보낼 수 없다고 했고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반박했다. 네 살 반에 네덜란드를 시작한 아이의 특성을 고려하면, 인풋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이는 문법은 자주 틀리지만 네덜란드어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고도 말했다.

“네덜란드를 떠날 건가요?”
마리엔느가 정면으로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루이가 로컬 아이들처럼 자라길 바랐다.
“그럼, 그 나이의 네덜란드 아이만큼 해야죠.”

그녀에게 루이가 영어를 잘하는 것도, 폴란드어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어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때부터 엄마와 루이의 노력이 시작됐다.
나는 먼저 스콜라(네덜란드의 빨간펜 같은 교재)를 풀게 해 실력을 확인했다.

루이는 놀라울 정도로 잘 풀었고, 어디가 부족한지 알 수 없었다. 이를 녹화해 선생들에게 들이밀었다.

나는 마이엔느의 평가가 불공평하다고 느꼈고 그녀를 신뢰할 수 없다는 편지를 교장에게 썼다.


곧장 GP에게 연락해 언어치료를 신청했다. 또 주변 중학생을 구해 네덜란드어 책을 읽어주도록 했다.

루이는 매일 나와 책을 읽고 발음을 연습했다. 주 2회의 언어치료, 주 4시간의 책 읽기, 자기 전 독서. 이 루틴을 1년 넘게 이어갔다. 내가 배워온 네덜란드어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 사이 마리엔느와도 한 달에 한 번씩 미팅을 했다. 나는 학교 수업 방식이 루이에게 충분한 인풋을 주지 못한다고 지적했고, 학교도 성의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학교를 옮길까 탐색도 했지만 마땅히 마음에 드는 곳은 없었다. 결국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내 문제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루이가 계속 저평가 받게 둘 수 없었다. 네덜란드는 초등학교 때 이미 대학에 갈 수 있는지가 어느 정도 결정되기 때문에 선생들의 평가가 중요했다.

마리엔느와 교장, 우리 부부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그들이 루이를 저평가하고 있다며 그동안 찾은 모든 증거를 내밀었다. 루이 학교는 아이 개개인의 학습 동영상과 사진, 문서를 기록해 사이트에 공유한다. 나는 여기서 그들이 어떻게 루이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 모두 찾아 내밀었다.


한 시간이 넘는 미팅 후에, 마리엔느는 자신을 믿어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고 그들이 이해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을 엄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극성 엄마인 것 같지만, 벨기에에서 네덜란드어를 배우면서 내가 느낀 건 유럽에서는 자기 변호와 자기 PR을 잘 하는 게 너무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뭔가 잘못 했겠지, 좋아지겠지, 열심히 조용히 하고 있으면 알거야, 라는 동양식 마인드는 유럽에서 나를 고립시킬 뿐이다. 루이가 아직 자기 변호를 할 수 없으니 보호자인 내가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아는 더치 친구들은 내게 자기들보다 대단하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말에 힘을 얻으면서도 얼마나 오래, 또 어떤 일로 내가 루이를 변호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1년이 지난 뒤, 공개 수업 날이 찾아왔다.
루이는 어느새 마리엔느의 최애 제자가 돼 있었다. 심부름을 척척 하고, 단어를 읽고, 계산을 하고, 발표까지 했다. 루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과 루이가 정말 자랑스럽네요.”

마리엔느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사이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루이의 한국어가 바닥을 뚫고 있었고, 팬데믹으로 폴란드 가족을 못 만나는 사이 폴란드어는 완전히 잊혔다. 우리는 급한 마음에 폴란드어와 한글학교를 알아봤다.

토요일마다 한국어 학교와 폴란드어 학교가 같은 시간대에 수업을 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라파엘이 폴란드어를 포기했다. 한국어는 나중에 혼자 배우기 어렵지만, 폴란드어는 네덜란드어와 비슷해 따라잡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번에 한국에 다녀오며 루이는 한국어가 조금 늘었고 다시 네덜란드어를 헤매고 있다. 영어는 읽기를 일부러 안 가르쳤는데 스스로 익혔다. 하지만 폴란드어는... 현재는 내가 루이보다 더 잘한다.


유럽에서 지내면서 주변에 멀티링구얼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모든 언어가 긴밀하게 닿아있으면서 또 그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어 여러 언어를 하는 친구들이 많다. 네덜란드어를 익히고 독일에 가면 독어가 어느 정도 보이니까. 하지만 많은 언어를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깊이 아느냐고 중요하지. 내가 루이에게 이걸 가르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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