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이들의 천국, 네덜란드

작은 것의 행복

by 명희진

라파엘을 만나기 전까지 네덜란드는 나의 관심 밖이었다. 이십 대 중반에 친구와 유럽 여행을 할 때도 암스테르담을 여행지에 넣지 않았다. 스히폴 공항을 거쳐 슬로바키아로 갔다가 스히폴을 통해 파리로 돌아오면서도 네덜란드는 넣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 그러고도 오랫동안 네덜란드를 여행하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게 네덜란드는 풍차, 튤립, 대마 그리고 공창제의 나라일 뿐이었다. 뭐든지 허용될 것 같은 무법의 나라가 밖에서 본 네덜란드였다. 암스테르담을 여행했다는 사람에게 호기심으로 대마나 홍등가에 관해 묻는 정도가 다였으니까.


그런 내가 네덜란드살이 16년 차가 됐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네덜란드는 아이를 낳기 전과 후가 달라지는 나라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네덜란드는 차가운 얼굴을 한 새침한 장신들의 나라였다. 어딜 가도 나는 '여행자'였다. 이웃들과도 살가운 인사를 하지만 거기서 다정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들도 내가 잠시 머물다 떠날 사람이라는 걸 아는 듯했다.


아이를 낳은 후 그들의 얼굴은 달라졌다. 적어도 루이를 격렬히 반기는 게 눈에 보였다. 그토록 무뚝뚝한 사람들이 아이를 보면 미소 짓고 장난치고 말을 걸었다. 시장에 가면 무시하듯 오래 기다리게 하던 사람들이 아이에게 과일 한 조각이라도 주려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아장아장 걷고 호기심으로 물건을 만지고 소리 지르고 우는 것에 존경스러울 정도의 인내심을 보였다. 내가 동양 엄마의 정서로 미안하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다 그래. 우린 괜찮으니까, 아이에게 신경 써."라고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그들의 불친절에 불만을 잔뜩 표시했던 게 민망할 지경이었다.


다른 특이점은 나는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면서도 루이는 자신들의 아이로 자랄 거라는 믿음이었다. 아이와 병원에 가도, 예방·발달 체크 센터(Consultatiebureau)에 가도 루이를 자신들의 아이로 받아들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내 아이를 이 나라의 미래 혹은 세계의 미래로 진지하게 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존중받는 기분이었다. 아이가 우리의 미래라는 인식이 그들에게는 분명히 있었다.


엄마가 됐을 뿐인데, 그 사회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는 아이를 낳고 간 한국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에서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버스는 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택시는 타더라도 눈치를 봐야 했다. 승용차가 없는 우리는 한국에 있는 내내 아기띠를 썼다. 외출할 때는 아기를 품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유모차를 끌고 갈 수 있는 곳은 집 주변이 전부였다.


여기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탈 때도 모두가 유모차를 들어줬다. 내가 유모차를 끌고 서 있으면 누구든 먼저 내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심지어 내 유모차는 Joolz로 대형이었다.

대부분 식당과 카페에는 당연히 기저귀를 갈 수 있는 공간이 준비돼 있다. 기저귀를 갈려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화장실을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인 유럽에서 아이를 위한 이런 배려는 놀랍다.


이 외에도 무수한 문제로 여전히 나는 한국에 아이와 갈 때마다 눈치를 본다. 애와 함께 어디를 가는 게 조심스럽다. 노키즈 존을 아이에게 설명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긴 마찬가지다. 특정 세대의 출입을 제한하는 건 한국에만 있는 문화인 것 같다. 사실, 이번에도 꽤 많은 세대 간, 젠더 간의 혐오를 겪긴 했다. 처음엔 화가 났는데, 지나고 보니 허무하고 슬프다.


루이가 학교에 가면서 '네덜라드인들의 아이 사랑'은 확신이 됐다. 학교는 내 아이를 특별히 더 편애하거나 돌보지는 않았다. 새로 온 아이라고 다른 아이들의 영역에 선생이 억지로 아이를 넣지도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떨어진 루이를 특별히 케어하지 않았다. 처음엔 루이가 혼자 있는 걸 보는 게 힘들었다. 친구를 찾아 헤매고 놀 거리를 스스로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에 선생이 좀 도와주면 싶었다. 하지만 커다란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아이들의 놀이에 선생은 거리를 두는 게 원칙이었다. 이게 처음에는 이상하고 서운했는데, 오래 생각하니 그게 맞는 것 같다. 스스로 자기 자기를 찾아야 한다고 선생은 내게 말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선생이 개입한다고. 하지만 선생이 개입하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대부분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자리를 잘 찾기 때문이다.


여름이 끝나, 휴가에서 돌아오면 동네에서 하는 축제가 있다. 매년 인공 바다 앞에서 하는 이 행사는 임시 바(bar)를 오픈하고 아이들을 위한 작은 축제도 함께 열린다. 아이스크림 트럭과 자잘한 먹거리 트럭이 오고 여러 종류의 에어바운스 놀이기구가 설치된다. 아이들이 거품 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이때는 수영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면 학교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아이들은 놀고 어른들은 스몰토크를 빙자한 롱토크를 하며 주말을 즐긴다. 그날은 새벽까지 시끄러운 음악이 동네에 퍼져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이 축제는 여름의 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다름 계절을 맞는 힘이 된다.


아이들의 파티가 끝나면 어른들의 파티가 늦은 밤까지 이어진다.


얼마 전에 집 앞 마트에 갔는데, 놀이기구와 만들기 행사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네처럼 매달려 빙글빙글 도는 기계도 있었다. 돈을 내려고 하니 공짜라고 했다. 거기서 하는 모든 게 공짜였다. 사실, 멋진 놀이기구도 아니다. 한국에 놀이기구와 비교하면 초라하기까지 하다. 여기서 행사가 대체로 그렇다. 그렇지만 즐기기에 충분하다. 좋은 날씨와 이웃, 그리고 친구들이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할까.



루이가 회전 그네를 두 번 타는 동안 나는 루이를 위해 블루이와 포토타임에 줄을 섰다. 한국 나이로 9살인 루이는 여전히 블루이를 좋아한다. 한국에 갈 때마다 언니와 조카들은 루이가 또래 아이들보다 많이 순수하다고 말하곤 한다. 눈치도 없고 여전히 유치원생 같은 루이를 보면서 나는 그런 루이가 답답하기도 하다. 이번 담임과 면담에서도 루이가 친구들의 악의적인 행동을 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했다. 루이는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지를 고민 중이라고 했다. 친구니까. 그렇게 친구와 클래스메이트를 구분하라고 일러줬는데, 루이는 여전히 모두가 친구다. 담임도 루이에게 악의적인 장난에 대처하는 법을 가르치며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고 일러줬다고 했다. 루이가 어디까지 어른들의 조언을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어떤 면에선 나는 그런 루이가 예쁘기도 하다.


루이가 조금 천천히 자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루이가 마음에 행복한 기억을 많이 저금해 두었으면 한다. 언젠가 힘든 일을 겪을 때, 그 기억을 하나씩 꺼내 힘을 얻을 수 있길 바란다.


keyword
이전 12화네덜란드 아이들의 생일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