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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 친구 사귀기

더치 날씨 같은 더치 사람들

by 명희진


네덜란드 사람을 친구로 사귀는 게 쉬울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결코 쉽지 않다. 아니, 평생을 살아도 당신이 이방인이라면 친구를 못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사람마다 친구를 정의하는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루이가 학교에 갈 때까지도 내겐 친구라고 부를만한 네덜란드 사람이 없었다. 물론, 스몰토크를 하고 어쩌다 밥을 먹고 근황 이야기를 하는 지인들은 있었다. 서로 연락하고 약속을 잡긴 했지만, 어느 한쪽이 연락하지 않으면 언제든 끊어지기 쉬운 실날같은 관계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사람을 좋아한다. 라파엘을 만나기 전에는 항상 밖으로만 돌았다. 집 밖을 돌다 그게 부족해 해외로 돌기 시작했으니까. 해외에서도 집에 잘 있지 않았다. 언제나 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가장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에 반해 라파엘은 혼자서도 잘 지냈다. 가까운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을 다방면으로 쓸 줄 아는 능력자였다. 그 가까운 한 사람이 내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내가 그 사람이 될 운명이었다. 나는 그의 친구이자 애인이고 보호자다.


그래서 처음엔 너무 외로웠다. 우리는 네덜란드에 있으면서도 항상 다른 나라를 떠돌았는데, 그래도 나는 외로웠다. 네덜란드에서 놀 친구가 없어서.

그즈음 나는 누구든 만나면 친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한국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고 만나서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고... 이 모든 게 친구를 만드는 과정이라 믿었다. 즐겁고 싶었다. 필리핀에서처럼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호주에서처럼 함께 여행을 다니며 우정을 쌓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들과는 좀 달랐다.


어떻게 달랐냐고?


그들은 마치 하루에 사계절이 있다는 네덜란드 날씨 같았다.


어제 분명 살갑게 인사하고 다정한 근황을 나눴는데, 오늘은 모르는 사람처럼 냉랭하기만 하다. 예측 불가능한 네덜란드 날씨처럼 그들의 기분도 예측이 불가능했다. 처음엔 우리의 대화를 곰곰이 더듬어 봤다. 혹시 내가 어떤 실수를 했을까, 같은 생각도 했다.

라파엘도 회사에서 자주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처음엔 자기가 어떤 실수를 한 건 아닐까 고민했지만, 이내 상대의 기분이 그날 좋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고.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도대체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린 어느 순간부터 예측 불가능한 네덜란드 날씨 같은 그들과 친구되는 걸 포기했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뾰족한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주변에는 다문화 커플이 늘었다. 주로 한국인 아내와 외국인 남편이었다. 이 역시 재밌고 좋았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나고 네덜란드 살이의 사소한 불만을 공유했다. 하지만 어딘가 네덜란드에 살면서 주변부를 도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루이가 학교에 가면서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가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이곳엔 외국인이 거의 없었다. 루이 학교에는 중국인 친구가 하나 있었지만 엄마의 출산으로 중국에 가 있었다. 몇몇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보였지만 대부분 부모 중 한 명은 네덜란드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아침과 오후에 같은 얼굴들과 마주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린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게 됐다. 그렇게 같은 얼굴들과 자주 마주치다 보니 자연스레 말도 트게 되고 근황도 알게 됐다. 또 루이가 학교에 적응하면서 플레이 데이트를 하게 됐고, 그 부모들과도 친해졌다. 아니, 친해졌다고 믿었다. 그런데 하루 지나 그들이 또 나를 쓰윽 지나가기 시작했다. 마주 보는 곳에서 인사하는데, 모른척 고개를 돌렸다. 누가봐도 의도적으로 피하는 거였다. 속으로 그럴 수 있지. 개인적인 일이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번번이 일어났고 나는 점점 지쳐갔다.


절대로 먼저 인사하지 않을 거야, 이런 다짐을 하며 현관문을 여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작심 일 초도 되지 않아 나는 "좋은 아침이야!"라고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들의 무시를 감수하면서도 나는 꾸준히 인사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점점 네덜란드 사람들과 친구 되기를 포기했다. 그들의 변덕으로 내 기분이 변덕스러워지는 날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다 정신병 걸리겠어!"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라파엘에게 불평했다. 그러면 라파엘은 이미 이런 일을 수 없이 겪었다는 듯이(그는 나보다 오래 네덜란드에 살았다), "모두에게 너무 친절하지 마."라는 도움도 안 되는 충고를 건네곤 했다. 나는 루이에게 가족 같은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니 아주 뚜렷하게 이상했다. 루이가 학교에 다니고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마다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질문이다.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들 모두가 비슷한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얼마나 여기서 살거니?"

혹은,

"언젠간 떠날 거잖아."


그때마다 우린 "지금은 여기서 정착할 거야." 하고 답하곤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지금'이 그들에게 문제였던 걸까? 그들은 왜 자꾸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는 사람을 통해 그 답을 알게 됐다. 물론, 이게 답이 아닐 수도 있다.

대부분 네덜란드 아이들은 한 동네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란다. 이동을 해봐야 고작 옆동네 정도? 그러니 가족도, 친척도, 부모의 친구들도 서로 잘 아는 사이다. 절대다수는 아니겠지만 도시가 아닌 이상 네덜란드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런 인생을 사는 것 같다. 물론, 개중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심지어 해외로 나갔다가 결혼할 때는 부모 옆에 둥지를 트는 네덜란드 사람도 봤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게 좋아서.


그래서 친구들도 대부분 유치원부터 친하거나 한동네에서 오래 만난 아이들이다. 그들은 거기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다. 내 아이가 이방인과 친구가 됐다가 이방인이 훌쩍 떠났을 때 베스트 프렌드를 잃을 아이를 상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네덜란드 친구 사귀기를 포기했을 때, 에바가 나타났다. 에바는 아론의 엄마다. 이때는 루이도 힘든 시기를 보낼 때였고 나는 루이에게 다른 친구들의 이상한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루이는 그들과 너무 가까이 있었다.

상실감에 아무도 아는척하지 않고 등교하던 그날, 아론이 루이에게 먼저 다가와 인사했다. 둘은 장난을 치며 학교로 갔고 나는 멀리서 남자아이와 걸어오는 여자를 봤다. 매일 아침 가벼운 인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이때는 사람을 사귀고 싶은 마음이 아주 사라진 상태라 인사도 건성으로 하고 그냥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우리는 마주쳤다. 하교 후에 놀이터에서 에바와 아론을 만났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리고 그녀가 문학의 이중언어로 논문을 쓴 걸 알게 됐다. 그녀는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소설을 쓴다고 했고 그녀도 시대물을 쓰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쾌하고 좋은 대화였지만 그게 다였다. 아론이 우리 집에 오고 루이가 아론의 집으로 놀러 가며 점점 친구가 돼 갔다. 나는 에바에게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건넸고 에바는 네덜란드어를 어려워하는 나를 위해 고등학생들이 읽는 네덜란드 필독 소설을 건넸다. 그녀는 내가 건네는 소설책을 다 읽었고 나도 그녀가 건네는 소설을 다 읽었다. 아이들은 점점 친구가 되고 있었고 나도 그녀와 천천히 친구가 되고 있었다. 그게 벌써 사 년 전이다. 지금 아론은 다른 학교로 전학갔다. 우리는 일 년에 두 번 정도를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아이들이 자라는 사소한 것들을 공유한다.


그동안 내가 네덜란드 사람들과 친구가 되지 못했던 건, 우리 사이에 함께 나눌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하나둘씩 친구들이 생기고 있다. 물론, 내가 생각하던 친구의 정의도 조금 달라졌다. 더는 새로운 사람이 낄 나이가 아닌 것도 이유겠지만. 이제 우리에겐 아이가 있고, 함께 시간을 보낼 가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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