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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 아이가 아프면...

기록의 중요성

by 명희진

"네덜란드는 살기 어때?"

내가 네덜란드에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묻곤 한다.

"의료 빼고 살만해."

그럼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한다. 정말 의료 빼고 살만하다. 사실 살기 좋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이곳에서 나는 경쟁과 시기 밖의 나를 자주 발견한다. 화장을 하지 않고 옷을 자주 사지 않는다. 낡은 운동화와 에코 백을 들고 어디든 가도 누구도 나를 가난하게 보지 않는다. 나를 부풀릴 필요가 없다. 누구도 내가 몇 살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이와 학력에 상관없이 우린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워진다. 그게 좋다. 그건 정말 큰 장점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재단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나를 조금 더 풍족하고 넉넉한 사람으로 만든다.


어떤 이는 먹을 것도 놀 것도 없다는 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

프랑스 여행 중에도 나는 네덜란드 마켓인 AH에서 파는 바케트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치 버터와 치즈를 함께 먹으면 꿀맛이다. 프랑스 바게트와 버터는 화려하다. 마치 프랑스인들 같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편안하지 않다.


프랑스 첫날에 우리는 어김없이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런 게 바게트야."

"버터는 또 얼마나 부드럽고. 풍미가 달라."

우리는 감탄하며 바케트를 씹어 먹는다. 바삭한 바케트에서 나는 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그런데, 며칠만 지나면 우린 "알버트 하인 바게트 먹고 싶다." 며 네덜란드를 그리워한다. 상황은 한국에 가서도 비슷하다. 한국에서 우리는 꽤 바쁘다. 주로 병원 투어를 한다. 치과를 다니고 내과와 피부과, 안과를 간다. 그러다 카페에 앉아 쉴 때면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놀랄 때가 있다. 집? 나에겐 머물러야 할 집이 두 나라에 있고 여기서 집은 네덜란드 집이다.


네덜란드 집은 내게 휴식이다. 한국에서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하루에 이만 보 이상을 걷는다.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을 타는 일상이 이어진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냥 출근 시간이나 퇴근 시간에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껴있으면, 여기서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른 점 하나는 화장을 자주 한다. 그러다가 옷을 산다. 미팅을 하면 그들이 나를 내 옷차림으로 판단하는 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에서 산 옷은 유럽에 오면 잘 입지 않게 된다. 우리는 루이가 대학에 가면 한국에 정확히 반, 유럽에 반인 생활을 자주 논하기도 한다. 혹은 다른 나라. 예를 들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 곳에, 가는 삶도 자주 이야기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가정의(GP)를 만나는 게 하늘의 별따기였다. 아무리 아프다고 호소해도 전문의를 만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주를 기다려 만난 GP는 내게 '건강한 여자'라고 가스라이팅 하기 바빴다.

"너는 건강한 여자야. 나가서 좀 걸어."

"그럼 정말 괜찮아질까?"

"그럼, 파라세타몰을 복용하고 맑은 공기를 쐬면 좋아질 거야."

"이미 다 해 봤어."

"그래도 나가 서 좀 걸어. 파라세타몰 양도 늘리고."


나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집에 와서 침대로 들어갔다. 침대 밖으로 나와 겨우 병원까지 갔는데, 나가서 걸으라니... 온몸이 으슬으슬하고 아무것도 삼킬 수 없는데, 그냥 걸으라니. 욕이 절로 나왔다. 엄한 라파엘에게 화를 냈다. 먹을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게다가 병원도 갈 수 없는 이런 곳에 나를 끌고 왔다며 짜증을 냈다. 지나는 이웃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그것도 라파엘 잘못이었다. 마치 그가 내 멱살을 잡고 지옥에라도 끌고 온 것처럼. 엄마의 허락을 구하던 애절한 나의 사랑이 육체적 불편과 불안에 흔들리고 있었다.


'맑은 공기를 쐬라고?'

겨우 일어나 밖을 한 바퀴 돌고 들어오면 조금 괜찮은 것도 같았다. 그러다 다시 아팠다. 모든 증상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듯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홈씩'인가? 뭐 이런저런 생각으로 내 병을 진단하기도 했다. 의사가 안 하니 내가 진단할 수밖에....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가져온 진통제로 버티거나 파라세타몰을 삼키며 증세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유럽에 살면서 느낀 건, 파라세타몰이 만병통치약이라는 거다. 이 대단한 합성약품이 지금도 유럽인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내 생각에 적어도 네덜란드인들은 파라세타몰 외에 다른 대안을 모른다. 한 네덜란드 친구에게 나는 이곳의 교육과 의료 시스템에 만족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한 번도 네덜란드 밖의 삶을, 심지어 자기가 사는 마을을 벗어난 적도 없었다.

"다른 삶과 비교하기에 나는 여기서만 살았으니까. 다른 대안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

이때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나의 경험이 모두의 경험은 아니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루이를 낳고 이 또한 조금은 달라졌다. 이들은 아이를 소중하게 대했고 예뻐했다. 간혹 그렇지 않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한국에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있으니까.


루이가 이유식을 시작했을 때, 고기를 먹였는데 두드러기가 났다. 처음엔 그냥 사라지겠지 했는데 점점 커지고 온몸으로 퍼졌다. 병원은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급한 마음에 주변에 한국 엄마들에게 연락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다들 병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는 비관적인 말만 늘어놨다.


라파엘이 응급실에 전화했다. 아이의 얼굴색, 호흡 같은 것을 물었고 조금 더 기다리자고 했다. 그는 내게 수화기를 넘겼다. 그건 내게 전사가 돼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아이가 호흡도 안정적이고 모두 괜찮다고 생명이 위독한 건 아니지만, 잘못될까 봐 두렵다고 했다. 내 목소리는 떨렸고 나는 내가 아이에게 실수로 독약이라도 먹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를 힘들게 갖은 점과 이런저런 내 불안을 과감 없이 드러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투머치토커다. 뭐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태어난걸....

가만히 듣던 상담사는 지금 바로 병원으로 올 수 있냐고 했고 우리는 즉시 응급실로 출발했다. 약을 받아왔고 약을 먹이자마자 두드러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물론, 매번 네덜란드 사람들이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건 아니다. 그럴 때는 투사가 돼야 한다. 나는 엄마니까. 루이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까. 내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상대가 알면 조심하게 된다. 한 번의 싸움 후에 내가 전화를 하면 그들 모두가 긴장한다. 그리고 나도 긴장한다. 하지만 괜찮다. 싸움 후에 적어도 얻는 것들이 있으니까. 최소한 이 싸움이 나의 패배는 아니라는 뜻이다.


언젠가 루이가 많이 아팠다. 열이 40도에 가까웠다. 네덜란드에서 40도는 지켜봐야 하는 온도다. 교차로 해열제를 먹여도 열은 계속 올랐다. 급하게 GP에게 연락했고 두 시간 후에 예약을 잡았다. 그런데, GP가 예약을 취소하고 내일 오라는 연락을 비서에게 받았다. 라파엘이 비서와 싸우다가 내게 수화기를 넘겼다.

"내가 왜 보험료를 내는지 모르겠네요. 아플 때마다 한국에 가고, 독일에 가고, 폴란드에 가면 내가 왜 여기서 이 비싼 보험료를 내야 하죠?"

사실 2년 전에 나는 담낭제거 수술을 받았다. 이유 없이 아프고 소화가 안 돼 아무것도 못 삼키던 건 담낭의 문제였다. 그걸 한국 건강검진에서 발견했다. 엄마가 선물로 준비한 검진이었다. 검진 후, 수술까지 일주일 밖에 안 걸렸다. 삼 년을 꼬박 아팠는데... 나는 이도 따져 물었다. 당신들의 실수로 우리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바로 책임을 물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숙련된 파이터다.

"이건 아이의 문제라고요!"

비서는 여러 번 GP와 통화했고 계속 거절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그 GP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나와 한판 오지게 붙었던 그 여자였다. 아이에게 24알의 파라세타몰을 먹여도 괜찮다고 했던 이상한 여자였다. 비쩍 마르고 코가 컸던 여자, 지푸라기처럼 푸석이는 금발 머리를 한 데로 아무렇게나 묶고 주름진 얼굴이 울긋불긋하던 여자.

"24알이요? 하루에?"

"당신은 마치 전문의에게 가는 길을 막는 문지기 같네요."

그녀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은 나를 도와주기 위해 있다는 뻔한 말을 했다. 나는 더는 그 여자와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비서에게 우리 가족에게 다시는 그 여자를 담당으로 넣지 말라고 했다.


더 많은 일이 있었지만 모두 말하긴 부족하다. 여기서 결과적으로 만족한 건 출산 하나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 정착하는 사람들에게 충고하곤 한다. GP를 잘 활용하라고. 아프면 일단 전화로 상황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 미세한 증상이 시작된 시기부터 알려야 한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도. 뭐 이런 것까지 말해야 돼, 싶은 것들을 주저리주저리 다 말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일정을 잡을 수 있다. 기록이 당신을 구할 수 있다. 그들이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수록 당신을 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을 활용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이곳은 네덜란드다! 갑자기 병원을 예약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조금 덜 쓰는 보험료와 메디컬 예산은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쓰인다. 그 믿음은 확실하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네덜란드의 장점은 세금이 잘 쓰이는 게 눈에 보이는 거다. 도로만 봐도 알 수 있다. 네덜란드의 고속도로는 다른 유럽의 도시보다 깨끗하다. 가까운 벨기에와 비교해도 알 수 있다. 의료도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물론, 이 안에도 아주 많은 문젯점이 있다). 가벼운 감기에는 파라세타몰이 정말 맞다. 한국에서 병원에 가도 진통제와 위장약 정도를 처방해 주는 걸 알 수 있다. 코스프레이와 목 스프레이도 함께 처방받을 수 있지만, 사실 그런 건 그냥 약국에서 살 수 있는 품목이다. 굳이 의사를 바쁘게 할 필요가 없고 의료재정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 나는 아직도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한국과 네덜란드의 의료정책이 적당히, 균형 있게 잘 섞이는 게 맞는 것 같다. 가끔은 사소한 감기도 큰 병으로 이어지곤 하니까.


정말 아파서 네덜란드 장기 의료 시스템이 필요한 사람이 되면 진짜 의료 강국과 복지 선진국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그게 이 나라의 장점이고 힘이다. 그 점이 내가 사랑하는 한국과는 다르다. 여긴 가족이 암에 걸린다고 가정이 흔들리지 않는다. 가족 중 하나가 불의의 사고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집을 팔고 가족 중 하나가 직장을 그만두고 병간호에 나서지 않는다. 사보험이 필요하지 않다. 사보험을 넣다가 경제적으로 힘들어 끊어야 하는 일도 없다. 실비가 없어서 더 비싼 검사 비용을 내지도 않는다. 술리오(아이가 물에 빠졌어요 편 참고)의 경우도 그랬다. 내 앞집에 친구도 그렇다. 오래전에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가장인 그의 병은 그들 가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나는 이게 정말 복지국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생활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나라가 도와주는 것 말이다. 정말 아프면, 그때부터 진짜 케어를 받게 된다. 평생, 당신이 나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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