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리오의 생일 초대
학교는 빠르게 사고를 수습했다.
심리 상담사들을 학교에 배치하고 학부모들에게도 심리 상담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나도 내 담당의 심리 상담사와 몇 번의 통화를 했고 내가 원하기만 했다면 그녀는 언제든 나를 만나러 와 주겠다고 했다.
이런 학교의 대처는 한국인인 나로서는 조금 생소했다.
루이는 밤마다 악몽을 꿨다. 새벽에 여러 번 깨서 우리 방으로 넘어와 함께 잤다. 어렵게 분리 수면에 성공했었는데, 다시 다 같이 좁은 침대에 눕게 됐다. 그래도 땀에 젖은 아들을 품에 안을 때는 안도하는 마음이 더 컸다.
사고 직후, 칠리오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 외에도 많은 학부모가 술리와 칠리오의 안부를 묻는 것 같았다. 삼 주 후에 칠리오가 학교에 다시 나왔지만, 이내 다시 사라졌다.
그즈음 학교 주변에 수사 테이프로 경계를 치고 무언가를 탐색하는 경찰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제 와서?'
라파엘과 산책을 하면서 우린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했다.
공대남인 라파엘은 챗GPT에게 물었고 술리의 부모가 학교를 신고했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지역 뉴스에서 우리는 모나가 인터뷰를 하는 걸 봤다. 모나는 무척 흥분해 있었지만 이 사고에 대한 학교의 책임을 강하게 따져 묻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모나에게 한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모나의 말이 맞았다. 많은 학부모가 흔들리고 있었고 실제로 주변 다른 학교로 옮겼거나 옮길 예정이었다. 사고가 있기 몇 달 전에 나는 학교를 옮기려 여기저기 알아보는 중이었다. 학교의 교육 방식에 불만이 있었고 다 언어인 루이를 학교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자유로운 방식의 학교에서 루이의 네덜란드어가 전혀 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루이에게 인풋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학교가 그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때 누구보다 나를 말린 건 모나였다. 모나는 아이가 넷이었고 넷을 전부 이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그중 첫째는 졸업해 중학교에 입학했고 둘째도 곧 졸업예정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중학교에서 매일 칭찬을 받는데, 그게 아이들의 개별성과 독립성에 무게를 둔 학교의 교육방식 덕이라고 칭찬했었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학교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루이 문제로 학교와 긴 상담을 했었고 그들을 한 번 더 믿기로 마음먹은 후였기에, 모나에게 적극적인 의견을 내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에 모나는 내게 조금 실망한 것 같았다.
술리의 사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지역 뉴스에 나왔다. 그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졸이지 않고도 술리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부득이하게도 사고가 사건이 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었지만, 학교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는 데는 동의했다. 술리와 같은 사고는 절대 학교 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고였다. 라파엘은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 때문에 소외되는 아이들이 있음을 항상 지적하곤 했었다. 그중에 친구 없이 홀로 떠도는 술리도 있었다. 그는 항상 이 형제들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조바심(?)을 표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너무 예민하다고 면박을 주곤 했었다.
사고가 된 술리의 사건은 이제 경찰과 법원으로 넘어갔다. 학교는 자신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고 말했고 일상으로 돌아오려 애썼다. 피해자는 있는데, 이를 책임질 가해자가 없었다.
얼마 후에 우리는 이 사건이 법원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학교가 속한 재단은 학교가 나태했다는 모나의 주장에 반박하는 글을 공지했다.
우리는 그들을 천천히 잊어갔다.
눈에 보이지 않았고 아무도 그 사고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가끔 아주 가까운 이웃이 내게 그들의 안부를 물었고 나도 아는 게 없었기에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여름 방학이 지나서였다. 학교에 가려고 현관문을 여는데 모나와 칠리오가 집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모나를 안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칠리오가 생일초대 카드를 루이에게 줬다. 아이들을 근처에 전통학교로 옮겼고 칠리오가 잘 적응하고 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술리의 이야기가 나왔다. 술리의 지능이 세 살 정도 되고 더 좋아질지 나빠질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 노력하고 있어."
"그래, 분명히 다 잘 될 거야."
이야기 내내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잘 될 거야.', ' 괜찮을 거야.' 같은 말이었다.
평소에 내가 너무 싫어하는 위로의 말이었다. 아무 위로도 되지 않는 말을 건네며 갈림길에 섰고 나는 언제 시간을 내 차를 마시자는 말을 했고 모나는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 한글학교가 끝나고 우리는 술리의 생일 파티에 갔다. 거기엔 열 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우리가 아는 아이들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그쪽 학교로 전학 간 아이들이었다. 반가운 인사가 끝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술리가 의자 끝에 앉아 있었고 아이는 정말 그 전과 똑같이 건강해 보였다.
나는 술리에게 손을 내밀었고 순간 우리가 있는 공간이 떠나가게 술리가 소리를 질렀다. 모나가 서둘러 아이를 안았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를 진정시키면서 동시에 나를 진정시켰다. 술리가 진정되자 모나는 아이에게 내가 루이의 엄마라고 말했다. 모나는 이제 괜찮다고 손을 내밀라고 했고 나는 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겁먹은 얼굴로 술리가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인내심 있게 술리가 내 손을 만지길 기다렸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했던 술리는 끝내 고개를 돌렸고 나는 허공에서 방황하던 손으로 모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몇 달이 흐른 후, 나는 모나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받았다. 학교와 선생들은 잘못이 없다는 법원의 결론에 분개하는 글이었다.
CCTV를 확인한 결과, 술리는 혼자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학교 후문은 닫혀있었지만 잠겨있진 않았다. 누구든 문고리를 돌리면 학교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있었다. 그건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유동적인 아이의 스케줄에 맞춰 수업 중간에도 아이를 픽업하는 부모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학교는 학교 문의 잠금장치를 모두 바꿨고 더 많은 감시카메라를 달았다. 놀이가 끝나거나 수업이 끝날 때마다 아이들을 세워놓고 수를 셌다. 이게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