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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절, 공동묘지 산책

by 명희진

루이와 함께 귀신의 집 같은 곳에 갔는데, 루이는 들어가자마자 자기는 여기 있고 싶지 않다고 해서, 20유로나 주고 간 귀신의 집을 그냥 나왔다.

"나는 그냥 사탕이나 받으러 다니고 싶었어."

분명 자기도 가고 싶다고 했으면서, 쫄보인 루이는 입구에서부터 이미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한 번만 들어가자고 달래서 안을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다 아팠다. 귀신의 집을 통과하는 내내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는데, 마지막 구간에서 루이는 내 손을 놓고 저 혼자 살자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엄마가 오는 줄 알았어."

한참을 뛰어가다가 뒤돌아보며 민망한 듯 루이가 웃었다. 귀신의 집 옆에 서커스 할로윈이 있었는데, 루이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집에 가자고 했다.





할로윈에 관해 적으려 했는데, 이번 할로윈에 딱히 한 게 없다. 그래서 만성절에 관해 적어야겠다. 11월 1일은 만성절((All Saints’ Day)로 우리나라로 치면 성묘하는 날이다. 폴란드는 이 날이 국가 공휴일인데, 네덜란드는 아니다. 개신교 신도가 많은 네덜란드에서는 가톨릭 축일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전부는 아니고 몇몇 지방에서는 성묘를 다니기도 한다지만, 어쨌든 국가 공휴일은 아니다.


아침에 어머님이 전화가 와서 성묘를 다녀왔다고 했다. 라파엘의 외조부모님이 모셔진 곳은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다. 예전에는 우리도 이때 성묘를 하러 휴가를 맞춰 가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폴란드에서는 이날이 중요한 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우리 시댁이 유독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머님은 주일에 성당에는 안 나가시는데, 무슨 날이면 성묘는 꼭 간다.


할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직장을 다니던 중이었는데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가서 묘지를 쓸고 닦고 초를 켰다. 거의 육 개월이 넘도록 초에 불이 꺼지지 않게 관리했다. 공대 여성인 우리 어머니는 입력 값이 들어가면 그 행동을 좀체 바꾸지 않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픈 다리를 끌고 성묘를 다니다가 겨울에 넘어져 더는 갈 수 없는 상황이 됐을 때, 그 횟수를 줄였다. 횟수를 줄였지 가지 않은 건 아니다. 내 기억에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가서 초가 꺼지지 않게 관리했다. 그때는 왜 저렇게까지,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어머니는 깊은 애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일 년은 꾸준히 할머니 묘지에 초를 밝혔다. 그 김에 다른 묘지에도 들리면서.


어머니는 이번 11월 1일에도 아침 일찍 성묘를 돌며 묘지 주변을 쓸고 닦고 꽃을 꽂고 초에 불을 켰다. 나는 오랜 경험으로 어머니가 어떤 경로로 묘지를 도는지 알고 있다. 처음에 어려서 죽은 아이들의 무덤 쪽으로 갔을 거다. 거기엔 어머님의 남동생이 묻혀있다. 그러니 라파엘의 삼촌이다.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육 개월도 안 돼서 죽었다. 병에 걸려 그랬다는데, 누구도 어떤 병인지 모른다. 외할머니는 꽤 오랫동안 10개월을 품고 6개월에 미치지 못하게 세상 밖에서 함께 한 아들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다음은 어머님의 할아버지, 그러니 라파엘의 외증조 할아버지다. 이 무덤은 어머님 말고도 다른 친척들도 함께 관리하고 있다. 다음은 라파엘의 외증조 할머니, 할머니 그리고 외할아버지의 무덤이다. 이 두 무덤은 사이좋게 나란히 있다. 사람은 셋인데 무덤은 둘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무덤 자리가 없어 외증조 할머니 무덤에 합장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시어머니와 함께 묻힐 줄 알았을까? 나라면 우리 시어머니랑 같이 묻히고 싶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죽은 자에겐 선택권이 없다.


라파엘 할머니의 이름은 야니냐 스타카토비체다. 장례를 치르며 언젠가 할머니의 죽음 후에 남겨진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제목도 정해 놨는데, 이제는 뭘 쓰고 싶었는지도 잊었다. 나는 그녀와 겨우 두 해를 함께 했다. 그마저도 한국과 일본, 중국을 다닐 때라 잘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를 보면 왜 라파엘이 나를 좋아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녀는 성격이 나와 비슷했다. 라파엘 집안에 그런 성격의 사람이 없는데, 할머니가 그랬다. 우유부단한 그들 사이에서 강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지만, 난 첫눈에 그녀가 나와 닮은 걸 알아봤다.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말하는 게 정말 좋았는데...

할머니는 우리가 갑자기 방문해도 냉장고를 뒤져 따뜻한 수프를 끓이고 메인으로 먹을 음식을 뚝딱 만들어 내왔다. 거기다 어디서 났는지 디저트와 차를 내주곤 했다. 배가 부르다고 해도 기어이 음식을 내오며 먹고 가야 한다고 했다.


라파엘을 만나고 이곳의 성묘 문화를 좋아하게 됐다.

유럽은 이상하게 집과 가까운 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사람들은 공동묘지를 산책하듯 걸으며 성묘를 한다. 묘지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공동묘지 앞 꽃집에서 꽃과 양초를 사 들고 산책을 하듯 그곳을 걷는다. 초는 5개가 필요하지만 우린 여섯 개를 산다. 남는 하나는 마리아상 앞에 밝힌다. 라파엘은 전에는 그곳에 길 잃은 영혼을 위해 초를 밝혔지만, 나를 만난 후에는 돌아가신 우리 아빠를 위해 밝힌다고 했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라파엘은 성당에 가거나 성묘를 할 때, 아빠를 위해 초를 밝혔다. 무뚝뚝한 나는 뭘 그런 걸, 이라고 했지만, 내심 고마웠다. 그 순간에 아빠를 기억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성당에 가면 자연스레 아빠가 떠오른다. 종교가 없는 나도 그때는 무릎을 꿇고 앉아 신께 빈다. 할머니와 아빠의 영혼이 평안한 곳에 머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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