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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선생님도 모르는 딸의 존재

by 이소

“아이고, 선우 어머니. 졸업식날인데 학교에는 어쩐 일이세요? 오늘도 어머니회 회의가 있습니까?”


“안녕하세요, 교감선생님. 우리 딸이 오늘 졸업을 해서요”


“딸이요? 어머니 딸이 있었어요? 우리 학교 학생이었습니까?”


엄마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리던 내 두 다리는 순간 들려오는 말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멈춰. 못 들은 척 해. 뒤를 돌아 눈을 반달로 휘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오늘은 즐거운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이다.


길고 긴 졸업식 행사가 끝나고 친구들과 부모님들은 여기저기 모여 사진을 찍었다. 선생님들이 그 사이사이를 지나며 손을 흔들고, 고개를 숙였다. 경쾌한 발걸음이다.


“효진이 어머니, 안녕하세요.”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희한한 일이다. 엄마는 우리 반에 온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아는 걸까.


“효진아, 저쪽에 진영이랑 사진 찍고 있을래?”


“알았어. 선생님 1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 임효진. 중학교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해라.”


엄마와 선생님을 뒤로하고 친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때였다. 1년 동안 나와 함께 했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딸은 없는 줄 알았습니다. 매일 학교 오시면서 어떻게 한 번을 안 오셨어요? 아들 교실에만 가시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손안에 가득 담긴 화려한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반에서 내 꽃다발이 제일 크고 예뻤다. 활짝 핀 분홍색 장미와 노란색 튤립을 하얀 안개꽃이 감싸고 있다. 어제 어머니회 회장 아줌마가 졸업 축하한다며 꽃집에 주문해 준 꽃이다.


웃자.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 오늘은 즐거운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너무 빨리 자랐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어린 소녀였지만 마냥 어린 소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이미 부모님에게 선우보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아무도 나에게 눈치를 주진 않았지만, 어른들을 살피며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했던 것 같다.


아빠는 선우의 치료비를 위해 매일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고, 엄마는 선우를 교육시키느라 바빴다. 우리 집에는 투정 부리고 떼쓸 수 있는 어린아이의 자리는 하나였다. 그리고 그건 당연하게도 내 것이 아니었다. 집에는 초등학교 6학년 소녀의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은 철없는 꼬마였다. 그래서 눈치껏 사랑받을 수 있는 곳으로 다리를 뻗었다. 학생이 어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찾았다. 공부 잘하기. 다행히 어렸을 적 엄마가 자연스럽게 책을 가까이하도록 해준 게 도움이 되었다.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공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가끔 사람들이 말하는, ‘수업시간에 집중하고 교과서만 열심히 보면 공부 잘할 수 있어요,’ 하는 어이없고 재수 없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아직 초등학생 때 이기도 했고, 서울의 학구열이 어마어마한 곳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방법은 성공이었다. 선생님의 칭찬을 듬뿍 받았다.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학교에서 하는 특별활동과 각종 대회에도 최선을 다했다. 엄마가 벽에 걸어놓은 상장이 점점 쌓여갔다. 내 방의 한쪽 벽은 상장으로 가득했지만 내 마음엔 단 한 장도 없었다.


반 친구들과도 모두와 친했다. 정말 모두와 잘 지냈다. 당시엔 러브장이 유행이라, 러브장을 몇 개 쓰냐에 따라 반에서 인기가 있는 아이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때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러브장이 너무 많아서 서랍에 다 못 넣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참 쓸데없는 거였는데, 그때는 그게 무슨 엄청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굴었던 것 같다.


수학여행 전에는 꼭 친구들과 모여서 장기자랑 준비를 했다. HOT의 캔디, 영턱스클럽의 정, 핑클의 내 남자친구에게… 대문자 I 인 내가 이때는 학교에 인생을 다 건 아이처럼 학교 생활을 했다. 사랑받기 위해서. 관심받기 위해서.


집에서 부모님이 줄 수 없는 관심과 사랑을 나는 학교에서 채웠다. 엄마를 집보다 학교에서 더 많이 봤는데도, 학교에서 내가 찾은 사랑에 엄마는 없었다. 그래도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어서 덜 외롭고 덜 힘들었다. 그래서 선우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엄마와 선우 덕분에 나는 최고로 즐거운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학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 지금 나에게, ‘그래도 서운하지 않았어요? 외롭지 않았어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서운했나? 졸업식 꽃은 조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차피 시들 꽃, 어차피 버릴 꽃. 누가 샀든 뭐 그리 중요할까. 다시는 만날 일도 없는 교감선생님과 6학년 담임선생님의 말이 뭐 그리 중요할까.


결국 내 옆에 있는 건 사랑을 표현할 줄도 모르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지켜야 할 선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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