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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갇혔고, 선우도 갇혔다

by 이소 Mar 13. 2025

나의 책 덕후 기질의 시작은 아주 오래전,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시점부터였을 거다. 어린아이는 뇌를 발달시켜야 한다며 엄마는 나를 책 속에 가두곤 했다. 정말 말 그대로 가뒀다.


선우가 태어난 뒤, 선우도 함께 갇혔다.


 



사락, 사락.

저 멀리서 익숙한 소리가 난다. 아, 이건 엄마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니, 선우와 나는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역시, 책 소리가 맞네.


오늘도 엄마는 우리가 낮잠 자는 사이에 주위에 둥그렇게 큰 책 벽을 만들었다. 빨강, 노랑, 초록 빨래집게들이 활짝 펴진 책들을 붙잡고 있다. 저거는 신데렐라, 저거는 담비, 저거는 피터팬, 저거는…


“선우야, 이거 봐봐. 펭귄 귀엽지?”


“펭귄은 주로 남극과 그 주변 지역에 서식하는 날지 못하는 새입니다.


“어… 그래, 맞아. 어떻게 알았어?”


“펭귄의 몸은 두꺼운 기름층과 깃털로 덮여 있어 추운 환경에서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펭귄은 대부분 물고기, 갑각류, 오징어 등을 먹으며......


내 눈과 입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랗게 벌어졌다. 선우가 나보다 똑똑한가?


나는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 책을 놓고 책 벽을 깡충 뛰어넘었다. 핑크색 내복 바지가 엉덩이에 낀 것도 모르고 부엌으로 내달렸다.


“엄마! 선우 천잰가 봐! 책을 다 외웠어! 나는 왜 못해? 난 안 똑똑해서 못하는 거야?”


엄마가 나를 보며 주저앉자, 순간 내 머리 위에서부터 달달한 딸기향이 쏟아졌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커다란 손이 내 오른쪽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하고 안전한 손이다.


“효진아, 너는 친구가 많지? 유치원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고, 우리 동네에도 있고. 그런데 선우는 친구가 없잖아. 그래서 그래. 선우는 친구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친구 대신에 책이랑 친구가 되게 해 주신 거야. 그래서 잘 외우는 거야.”





성인이 된 지금, 나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특정한 주제에 유난히 뛰어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걸 안다. 선우는 기억력과 집중력이 남달랐다. 선우는 유달리 백과사전이나 과학전집 같은 것을 외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엄마에게 ‘난 왜 책을 못 외워?’라고 물었을 때, 엄마가 다르게 대답했다면 어땠을까? 그날의 나는 선우를 미워하지 않고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선우가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된 날이었다.


하지만 그날 엄마의 대답은 정답이 아니었다. 거짓말이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일까?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아이가 너무나 힘든 삶을 사니까, 하나님이 위로의 선물로 특별한 재능을 주신 것은 아닐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는 선우. 그래서 책이 친구가 되어주도록  것은 아니었을까?


백과사전, 과학전집은 그때의 선우에게 정말 유일한 친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만들어준 책 벽은 선우에게 가장 따뜻한 울타리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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