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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LifeBGM 05화

LifeBGM | 시간은 눈먼 인도자.

Thomas Strønen - Time Is A Blind Guide

by Ggockdo


4월 햇볕에 부는 바람이 아직 서늘합니다. 바람은 시간이 지나가는 인기척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속절없다는 것도, 빠르다는 것도, 그러다가 갑자기 느려진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시간이 과연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시간은 늘 두렵습니다.


시간을 두려워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제어하고 관리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으로 시, 분, 초도 만들고 날짜 가는 것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간은 두렵습니다. 때로는 시간은 공통의 것이 아니라 나만의 시간으로 나와 함께 태어나서 나와 함께 살다가 내가 죽으면 결국 내 시간도 죽는다는 걸 떠올립니다. 시간은 나와 함께 태어나는 쌍둥이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이상합니다. 날씨가 이상한 점도 한몫합니다. 시간을 알려주는 게, 주로 디지털 장비인 것이 어느 날은 갑자기 시간을 이상하게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닭울음도 사라지고 해시계로 삼을만한 나무그림자도 망가진 시내는, 사는 일들이 별스러운 갖가지 소식들이 너무 많습니다. 시간에 비해 감당하기 버거운 일들이 우후죽순으로 자라나 시간이 터질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 벌어지는 일들과 그것을 다 알고자 하는 욕심이 불어나 시간이 팽팽하게 부풉니다. 그 속에 한낱 인간으로 서서 시간의 압력을 견뎌내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요?

가끔, 시간은 쌍둥이가 아니라 나를 잡아먹는 괴물이

됩니다.


on Thomas Strønen - Time Is A Blind Guide


음악은 시간을 가장 잘 다루는 예술입니다. 나는 시간에 잡아먹힐 것 같을 때마다 음악을 듣습니다. 그러면 시간 대신 음악이 잠깐 나를 잡아먹습니다. 내가 잡아먹혀도 좋을 음악을 선곡하는 게 그래서 중요합니다.

토마스 스트뢰넨의 음악은 시간 안에 빽빽하게 들어 차있던 사건들을 하나씩 꺼내 버려 버립니다. 천천히 느리게 밀려오는 음악은 규격도 없고 형식도 없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시간 자체로 드러냅니다.


이제 나는 사건과 생각이 드문 드문 사라진 시간의 숲에 놓입니다. 막막하지만 넓고 먹먹하지만 아름답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무엇을 따라가야 할 지 눈치챕니다.


여유가 없었습니다. 누구 탓을 하면 편할까, 해서 특정 위인을 콕 집어 보아도 편치 않습니다. 나와 같은 시간을 흘러 왔는데 어떤 이는 더 나은 선택을 한 것 같아 보이고 어떤 이는 좀 더 행복해 보입니다. 우리는 결국 서로의 시간을 비교하느라 길을 잃습니다.

길을 잃으면 여유가 없어집니다. 불안은 좀 더 심장이 잘게 뛰는데 그렇다고 부지런하지도 않습니다. 쓸데없는 부지런함이 나를 비웃었습니다.


스트뢰넨의 음악은 유난히 비정형적이라 형태를 갖춘 생각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뚜렷한 것은 음이 시간을 조물락거리는 조용한 움직임뿐, 내가 누구인지 어쩌다 길을 잃었는지, 무슨 공사다망한 일념이 있어 이리도 거센 압력에 눌려 있는지 흉보지 않습니다.


"Time is A blind guide." 시간은 눈먼 안내자입니다. (Anne Michael의 소설 [Fugitive Pieces]에 나오는 말로 Thomas Strønen이 결성한 팀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는 눈이 멀어서 나의 속내나 내 사건과 생각의 형태를 보지 못합니다. 그는 눈보다 귀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지금 듣는 음악에 보다 집중합니다. 촉각이 중요해서 서로 껴안아야 합니다.


스트뢰넨의 음악 말미에 이르니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이토록 섬세한 물길과 갈대숲길로 안내하는 자가 눈이 멀어 나의 초라함과 불안함을 보지 않는다고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시간은 다시 내 형제가 됩니다. 그는 길을 알고 나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악이 계속 흐르는 쪽으로 안내할 내 시간을 따라 천천히 숨 쉬며 삶이 갑니다. 내일이면 또 나는 알람에 불과할 시간의 파편에 쫓기고 시간에 비해 지나치게 팽창한 인간세상 소식에 또 허덕이겠지만, 괜찮습니다. 시간의 정체를 이제 압니다.





안웅철 사진작가의 작품이 표지인 Time is a blind 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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