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LifeBGM 04화

LifeBGM 나와 같이 걷는 것들

이한얼 - Waik with you

by Ggockdo
LifeBGM.jpg


나는 혼자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나의 내면과 걷습니다. 나의 서글픈 자아와, 울고 싶은 마음과, 웃고 싶은 소망과 걷습니다. 하나의 몸, 두 개의 다리에 올라타 있지만 나와 함께 걷는 것은 참 많습니다. 나는 내 생각과 걷고 있습니다. 내 생각은 나를 생각합니다. 종일토록 혼자인 기분이었던 내 팔짱을 끼고 같이 걸어줍니다. 그러니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


on 이한얼 - Walk with you


때로는, 혹은 자주, 몸 하나로 걸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충만한 기분이 듭니다. 그것은 내 배꼽에 연결된 내 부모의 유산과 그들의 부모와 또 그들의 부모와, 멀리 멀리 이어진 아득한 인류의 역사가 내 몸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약같이 보여도 우리가 배꼽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합니다. 밀란 쿤데라는『무의미의 축제』에서 배꼽이 없는 천사의 외로움을 잠깐 숙고했지요. 걸으면 배꼽 부위를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배꼽과 함께 걷습니다. 배꼽과 걷는 것은 곧 나의 존재 이전의 모든 존재들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멜랑콜리한 피아노 솔로의 연주는 아마 그들이 저 멀리서 노을이 지는 쪽으로 먼저 걸어나간 발걸음을 떠올리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피아노 솔로곡은 참 외로울 것 같은데 듣다보면 풍성합니다. 피아니스트는 혼자 연주하지 않습니다. 그의 생각과 예술가의 자아가 그와 함께 연주했겠지요. 그리고 그의 연주와 함께 걸으면 그의 수많은 동행인과 내 안의 많은 동행인이 한 무리가 되어 큰 떼를 이룹니다. 88개의 건반만큼 큰 조직을 이룹니다.


또 나와 함께 걸으려는 것들이 많습니다. 나는 배꼽 생각을 멈추고 조금 울고 싶은 마음과 나란히 걷습니다. 울고 싶은 마음은 걸을 때 힘이 없어서 같이 걷다보면 그를 부축하기 위해 이를 악물게 됩니다. 또는 눈에 힘 주게 됩니다. 그 친구는 시도때도 없이 연약한 눈동자 위에서 미끄러져 넘어집니다. 나는 그를 잘 챙겨가며 걸어야 합니다.

내 마음은 가끔 나를 안쓰럽게 쳐다봅니다. 마침 내 얼굴이 유리문에 비칩니다. 이렇게 비치는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나를 보고 있다는 묘한 기분이 듭니다. 눈 밑의 근육이 잘게 떨리고 내 외모를 점검하기보다 내 슬픔이 얼굴에 드러나는지 검토해 줍니다.

만약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피부의 뾰루지나 모공, 밥 먹고 지워진 입술색이 보이기보다 텅 빈 공간 너머의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든다면, 그 때가 바로 내 마음이 나를 바라보는 때입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조금만 더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나를 안쓰러워하고 안아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지금도 내 마음은 나를 안아주고 싶어합니다. '오늘은 참 고단했어.' 속삭이며 나를 안쓰럽게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음악 한 곡 들어보지도 못하고 시끄러운 사람 말소리에 귀에 땟국물이 다 줄줄 흐를 지경인 것도 알아서 그렇습니다.


몸이 붕 뜬 것 같거나 의식이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무의식이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중입니다. 내 무의식은 의식보다 몸집은 더 크지만 좀처럼 대우받지 못해서 대체로 흐릿한 색채를 가졌습니다. 그래도 나를 떠나지 않고 과자봉지의 빵빵한 가스 충전제처럼 내 부피의 대부분을 담당해 주고 있습니다. 무의식과 걸으면 몸의 질량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집니다.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이 유난히 크게 들리면 무의식의 질감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음과 음 사이에 혼합되어 있는 여운이나 잔여음의 울림처럼 웅웅 거리며 나와 갇습니다. 내가 음과 음 사이가 긴 느린 솔로 곡을 들으며 걷는 이유도 무의식과 좀 더 친밀하게 함께 걷기 위해서입니다.

무의식은 알고 있습니다. 내내 활기차게 웃고 친구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웃고 싶은 순간은 참아야 했었다는 것을. 내 무의식은 저절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순간이 찾아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조금은 나도 모르게 입술 끝이 움직였으니 어느정도는 성공한 셈입니다.


나는 음악과 걷습니다. 음악은 이미 끝났지만 머릿속에 남은 음악이 자꾸 맴돌면서 나와 걸어줍니다. 이제 이 음악은 내 것입니다. 연주자와 작곡가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내 음악과 걷습니다. 나도 모르게 멜로디를 흥얼거렸습니다. 아무 음이 나오지 않게 된 이어폰을 끼고 여전히 나는 나와 걷습니다.




앨범커버_이한얼_My-Conversation-2-300x300.jpg 이한얼 : My Conversation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3화LifeBGM | 지하철 보사노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