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 700RS
자동차 이야기
재미있는 사연을 가진 클래식 카
2017년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일부를 돌며 클래식 카 관련 취재를 했다. 크고 작은 박물관과 개인 컬렉터 방문부터 다양한 클래식 카 이벤트 참석까지 정신없이 보내던 때다. 땅덩어리가 큰 만큼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일부를 보고 미국의 클래식 카 시장이나 산업을 논하기는 그렇지만 그때 본 광경들과 하나하나의 사연들은 굉장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미국에서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자동차 디자인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아트센터 컬리지 오브 디자인(크리스 뱅글, 전명준, 헨릭 피스커, 칩 푸스 등 유명 자동차 디자이너와 영화감독 마이클 베이가 이 학교 출신)의 이탈리아 차 마니아 교수부터, 클래식 카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자선 사업가, 열정 하나로 똘똘 뭉친 클래식 카 전문 기술자 등 한국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 재미있고 열정 가득한 그들의 얘기를 듣거나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차들을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컬렉터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클래식 BMW 수집가이다. 자신의 신상과 개인 창고의 위치만 밝히지 말라는 조건을 제시한 그는 작지 않은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 중이다. 물론 비정상적인 일을 하거나 우리나라처럼 세무조사를 걱정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차 좋아하는 사람과 사람으로 보자는 것이 그의 조건이었다. 사무실 옆에는 개인 차고가 있으며 두 명의 전문 기술자들이 상주 중이다. 이곳의 주인장(편의상 A라고 부름)이 소유한 BMW는 총 55대. 희귀 모델과 대중적인 모델이 섞여 있고 정비를 위한 공간과 부품창고로 쓰는 공간까지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컬렉터의 모습니다. 다른 차들도 많지만 클래식 BMW만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 좋아했던 아버지 차인 2002와 그 차를 타고 다니던 추억’ 때문이라고 한다.
55대의 클래식 BMW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품 수급부터 정비, 컨디션 유지까지 웬만한 서비스센터 규모의 시설을 갖춰야 한다. 또한 이곳에 있는 모든 차는 언제든 주행이 가능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A는 ‘소장도 의미가 있지만 차는 움직일 때 가장 아름답다. 실제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안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즐겁다’라고 얘기한다.
처음 A의 개러지를 소개받았을 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자동차 문화니 클래식 카니 컬렉터니 하면서 소개받은 사람 대부분이 거의 사기꾼 아니면 단순히 오래되고 부품도 제각각인 고물차(가치라는 게 없는) 몇 대 가져다 놓고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차에 대한 애착도 지식도 없다.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차를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그래봐야 20년 내외) 가치 있는 차처럼 소개하는 뻔뻔함에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A는 그가 소유한 55대의 차를 매일 번갈아 타고 다닌다고 한다. 물론 업무용은 좀 더 편리한 차를 이용하지만 매일 잊지 않고 컨디션을 확인한다고 한다. A의 차는 모두 각각의 특별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이 그의 추억인데 그중 2002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02로 끝나는 BMW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생산된 소형차이다. BMW가 한창 경영난을 겪던 시절에(BMW는 도산 위기를 여러 번 겪으면서 2류를 자동차 메이커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등장한 02 시리즈는 1802, 1502가 인기를 끌면서 BMW가 소형차 시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후 02 시리즈는 BMW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탠더드라 불리는 3시리즈로 바뀌면서 현재까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BMW가 헤리티지에 눈을 돌린 건 비교적 최근이다. 역사는 100이 넘었지만 독일 자동차 메이커 중에 가장 헤리티지 관리에 소홀했던 메이커가 BMW다. 또한 롤스로이스나 미니 같은 헤리티지가 뚜렷한 회사를 인수해 자신들이 갖지 못했던 헤리티지를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부분에 대해 클래식 카 골수 마니아나 컬렉터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하며 모리스나 오스틴, 브리티시 레이랜드에서 생산한 클래식 미니 팬들과 2000년 대 이후 BMW 산하에서 생산된 미니 팬들이 서로의 정통성을 두고 대립(?) 하고 있는 것은 자동차 업계에서도 매우 유명하다.
BMW 700RS
A의 개러지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전 세계에 딱 두 대만 남아 있는 희귀 모델을 보기 위해서였다. 처음 취재를 위해 접촉했을 때 A는 이 차가 언론에 공식적으로 공개되는 것을 처음이라고 했다. (세계 최초로 월간 <자동차생활> 2018년 2월호에 소개되었다)
A의 개러지 구석에서 꺼낸 작은 로드스터는 이름도 생소한 BMW 700RS. BMW 700RS의 공식적인 생산 대수는 2대. 한 대는 뮌헨의 BMW 박물관에 있고 나머지 한 대가 남부 캘리포니아 어딘가인 이곳에 있었다. RR 레이아웃을 가진 소형차 BMW 700(1959년부터 1965년까지 생산) 시리즈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700RS(1961년형)는 경량 튜블라 섀시를 가진 경주차이다. 원형인 BMW 700 시리즈는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 거장 지오반니 미첼로티가(페라리, 마세라티, 트라이엄프, 오스틴, 란치아 피아트 등 디자인) 디자인을 담당했으며 단종 때까지 무려 18만 8천여 대가 생산되었다.
700RS의 구동계와 레이아웃은 700에 두고 있지만 경량 설계와 공력 특성을 고려한 디자인은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모든 공정은 수제작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낮은 차체와 루프가 없는 매끈한 형태의 보디가 인상적이며 시트를 제외한 모든 편의 장비는 탈거했다. 엔진은 생각보다 작다. 697cc 2 기통 수평대향 엔진은 최고 출력이 약 85마력 정도지만 차체가 워낙 가볍고 촘촘한 5단 변속기 덕에 민첩한 움직임을 보인다.
사실 이 차에는 A가 소유한 다른 BMW 보다 조금 특별한 사연이 있다. A는 전설 혹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700RS를 수소문 끝에 존재를 확인하고 매입 준비에 들어갔다. 전소유자가 A에게 팔기 전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 조건이 매우 특이하다. 전소유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독일 BMW 본사와 북미 BMW에 이 차를 넘기지 말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여기에는 BMW가 미국에 본격적으로 상륙했던 시절, 기존 BMW 고객(주로 클래식 모델을 소유한) 소홀이라는 이유가(신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만 챙기는) 있었는데 원래 주인이 그 부분에 대해 매우 빈정이 상한 것이다. 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BMW가 미니를 인수하면서 그 헤리티지는 마케팅으로 적극 활용하면서 정작 클래식 미니나 그 소유자는 제대로 서비스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 이 차의 가치와 존재를 알게 된 BMW가 매각을 제안했지만 전주인은 거절했고 700RS는 그대로 미국에 남았다. A 역시 전주인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고 한다. A의 말에 따르면 이 차는 레이스에 출전해 온전하게 완주한 유일한 차인데 그 가치는 현존하는 BMW 경주차 중에 가장 높다고 한다. 모터스포츠 정신을 늘 강조하는 BMW 입장에서 이 차는 그야말로 원류 중에 원류인 셈이다. 뮌헨의 BMW 박물관에 있는 나머지 한 대는 예선 도중 사고로 반파된 차를 리스토어 했으며 실제로 변변한 주행기록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