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이야기
대배기량과 큰 차체, 넉넉한 토크는 미국차를 상징하는 키워드이다. 광활한 대륙이라는 배경이 있는 만큼 미국차는 합리성을 따지는 유럽차에 비해 넉넉한 공간 활용이 특징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미국차들의 국제 시장에서 받는 대접은 생각보다 좋지 않다. 물론 포드 GT나 쉐보레 콜벳 같은 차들은 미국적인 특성이 가장 잘 나타나 있고 명차를 논할 때 빠지지 않지만 대중적인 미국차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워낙에 미국 내수 시장이 크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방만함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미국 자동차 역사를 뒤돌아보면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아까운 부분이 많다.
자동차 종주가 유럽이라고는 하지만 규모를 키우면서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먼저 자리 잡은 곳은 미국 대륙이다. 1900년대 초반 이미 미국은 마차를 대신해 등장한 자동차를 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으며 포드 자동차의 설립자인 헨리 포드가 내세운 '노동자가 살 수 있는 자동차'라는 슬로건 아래 규모를 키웠다. 풍요로운 물자와 광활한 대륙, 넘치는 노동력이 가득했던 미국의 자동차 시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역사가 길고 다양하다. 대량생산 체제와 소량 주문제작 방식이 공존하고 유럽에 비해 자동차의 종류도 훨씬 다양하고 대중적이었으며 자동차 역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실험적인 차들도 많았다.
1920년대는 그야말로 미국 자동차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다. 당시 수공업에 의존했던 대부분의 유럽 메이커들이 귀족과 부호들을 위한 소량 생산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과 대량 생산 체제 아래 시장을 넓혀 갔다. 포드가 최초로 자동차 생산에 적용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5분에 한 때씩 완성품을 만들어 냈으며, 이후 시트로엥과 르노도 포드의 시스템을 도입한다. 포드와 쉐보레를(GM) 필두로 대량 생산이 자리를 잡으면서 자동차의 가격이 낮아졌고 뒤센버그나 패커드 같은 신흥 부호들을 위한 소량 주문 제작 방식이 공존하고 있었다. 내연기관뿐이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사장된 증기차와 전기차가 등장하면서 한 때 미국 자동차 시장의 70% 가까이를 증기차와 전기차가 차지하고 있던 때도 있었다. 물론 효율이 떨어지고 안정성 때문에 내연기관에 밀리게 되지만 그만큼 미국 자동차 시장은 상상이상의 다양함이 공존했다는 의미다.
미국차는 1970년대까지 디자인과 기계적인 구조 등 자동차 전 방위에 걸쳐 끊임없는 도전에 연속이었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지금은 흔하게 사용하는 자동변속기를 대중화시킨 곳도 미국이고 유압 시스템을 사용한 컨버터블도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유럽은 지금도 수동변속기의 점유율이 국가에 따라 90%가 넘는 곳도 있지만 미국은 이미 1950년대 일부 스포츠카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자동변속기를 기본으로 사용했다. 2차 대전 이후 귀국한 상의용사들을 위해 고안된 자동변속기는 이후 폭발적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였고 현재는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95%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테일 핀, V8 엔진, 핫로드, 머슬카
자동차 역사가 길고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지만 아쉽게도 미국의 클래식카 중에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모델은 유럽에 비해 드물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대량 생산. 클래식카의 가치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희소가치에 있어서 미국차들은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쉐보레 같은 회사들이 이미 1920년대에 단일 차종으로 연간 20만 대 이상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차는 그야말로 찍어 낸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반면 유럽의 클래식카들이 인정받는 가장 큰 이유가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희소가치인데 부가티나 알파 로메오 특별 모델의 최종 생산 대수가 많아야 20대 남짓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반면 195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미국차의 과감한 디자인은 일본차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유럽 영향권 아래 있던 호주도 미국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차 하면 떠오른 디자인은 단연 테일 핀이다. 길게 늘인 뒷부분에 항공기의 날개에서 영감을 받은 과격하고 과감한 마무리는 유럽차의 선 중심의 오밀조밀함과는 그 맥락 자체가 다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랑하고 메릴린 먼로가 즐겨 탔으며, 케네디가 애용했던 1950년대 차들을 보면 대부분 테일핀 디자인을 적용한 차들이 많다. 덩어리에서 시작해 큼직하게 깎아내면서 외관을 과감하게 다듬고 넓은 실내 공간에 자리 잡은 푹신한 벤치 시트, 강력한 V8 엔진까지 갖추면 그야말로 전형적인 미국차의 특성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거대했던 미국차들은 안타깝게도 두 번 의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등장한 친환경과 경제성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미국차 하면 OHV V8 엔진을 장착한 핫로드도 빼놓을 수 없다. 핫로드는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자동차 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핫로드의 시초는 대공황 이후 시행된 금주법의 단속을 피하기 위한 고성능 주류 운반 자동차에서 시작한다. 핫로드의 가장 큰 특징은 개조를(튜닝)을 통해 속도를 높였다는 점인데 미국 튜닝 시장의 시초로 불리기도 한다. 이후 모터스포츠가 점점 자리를 잡으면 드래그(400m 단거리 경주) 경기에 적합한 차들을 의미한다.
머슬카 역시 미국차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의 하나. V8 엔진에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디자인을 가진 미국산 스포츠카를 뜻하는 머슬카는 미국뿐 아니라 자동차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인기다 있는 차종이다. 머슬카의 황금기라 불리던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말까지는 플리머스, 포드, 쉐보레, 폰티악, 닷지, 뷰익, 올즈모빌 등 대부분 미국 자동차 회사는 저마다 자사를 대표하는 머슬카를 한 대씩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미국차가 유럽차의 고급스러움에 치이고 일본차의 경제성에 치이고 한국차의 가격에 치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멋과 낭만을 상징하고 있었다. 넉넉한 토크와 낮은 회전수, 쉬운 유지보수, 과감하고도 멋들어진 디자인 등 미국 대륙에서는 전통적인 미국차가 가장 잘 어울린다. 아메리칸 럭셔리의 상징인 캐딜락이 대중차 메이커인 BMW를 따라가기 바쁘게 된 것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다운사이징과 친환경 시류에 휩쓸리고 판매량 감소와 브랜드 폐지 등으로 인해 과거의 멋들어진 차들을 볼 수 없지만 크고, 아름답고, 대륙성 기질이 가득한 미국차가 가지고 있는 낭만은 자동차 올드팬들에게 아련한 향수처럼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