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떡국

냉장고 구석에 쳐박혀있던 김칫국의 메이크오버.

by 우연의 새

4월 중순인데 엊그제는 우박과 눈이 흩날렸다. 아침엔 거의 0도에 가까운 날씨.


안그래도 힘든 월요일, 비가 흩날리는 우중충하고 쌀쌀한 하늘의 봄날.


뜻대로 풀리지 않는 회사일에 위축과 우울감이 몰려오고, 이 와중에 업무량은 폭발하고, 사랑스런(?!) 사춘기 두 딸의 라이프는 어떠신지도 종종 들여다봐야 하고, 동병상련 40대 후반 월급쟁이 남편 역시 영 표정이 시원찮다.


파김치된 몸을 이끌고 퇴근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직 학원에서 돌아오지 않은 두 딸 대신 남편이 이미 귀가해있다.


"회사 안 갔어, 오늘??"

"오늘 건강검진이었잖아~"


어차피 남편이 준비하는 저녁식사는 내 성에 차지도 않아서 그걸 바라는 것도 아니지만, 왠지 조용한 집에서 혼자 호젓하게 있는 남편을 보니 울화가 치민다. 나이들어서 그런지, 자꾸만 쉽게 올라오는 화와 노여움. 끙..


곧 귀가하실 따님들 저녁상을 대령해야하는데..뭘 먹어야하나. 밥솥엔 무려 보관시간 30시간이 넘어가는 밥이 있다. 내가 했던 건 아닌 것 같고, 1주일에 한번 정도 오시는 어머님이 하셨던 것 같은데.. 아이들이 원래 밥과 국, 반찬 구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차리는 나도 힘든, 노동집약적 한식 밥상. 일찌감치 넌 아웃. 그럼 다음 타자는 무엇인가..다용도실에 있는 김치냉장고로 가는 길에 창밖을 슬쩍 봤는데 (벚꽃 빼면) 초겨울 저녁같은 느낌의 풍경.


이런 날씨엔 국물이 좋겠군. 냉장고를 열어보니 두종류 국이 날 쳐다보고 있다.


들깨미역국은 어머님이 해다주신 것이고 그 옆의 김치콩나물국은 내가 얼마전에 끓였던 것이다. 오늘같은 날씨엔 왠지 칼칼뜨끈한 김치콩나물국이 좋겠어.


하지만 국과 밥을 먹으려면 반찬도 있어야한다. 고기든 생선이든 메인요리가 보통은 있어야하는데 나에게는 재료도, 아이디어도 없다. (재료는 뒤져보면 있을 순 있지만, 냉동실을 지금 뒤엎을 에너지는 없다) 고로 국은 먹되, 다른 아이디어가 필요한데.. 이럴때 내가 종종 써먹는 꼼수.



남은 국에 떡국떡을 투하하는 것이다.


사실 떡이란 것이 밥과 다름없는 것이므로 (쌀이라는 차원에서) 국에 떡국떡을 넣어먹으면 밥과 국을 먹는 효과를 얻는다. 게다가 밥과 국을 먹는 것은 성실한 정석, 기본에 충실같은 느낌이라면, 떡국은 별식같은 느낌이 난다. 밥과 국이 월요일이라면, 떡국은 금요일까진 아니어도 목요일 정도의 느낌이 나는 것이다.


떡국떡을 냉동실에서 찾아내면서 만두도 찾아냈다. 아싸~ 근사한 한끼가 되겠군.


자, 이제 요리(라고 할 것도 없지만) 시작. 라면보다 더 쉬운, 가스불 켤 줄만 알면 끝나는 요리.


가스불에 국을 올리고 끓으면 떡국떡을 넣는 것이다. 끓어오르면 만두도 투하. 간을 보니 떡과 만두가 들어가서 살짝 싱거워졌나? 싶어서 소금을 조금 더 넣었다. 소금만 넣으니 감칠맛이 좀 덜한 것 같아서 초피액젓도 몇방울 추가.


맛을 보니 이건 뭐 짬뽕, 라면 저리가라인데. 게다가 덤으로 콩나물과 김치도 들어갔으니 나름 야채 섭취까지 성공!


마라탕 사랑이 지극한 딸들도 만족하실 것 같다. 맛보겠다는 핑계로 이미 한 열숟가락은 내가 떠먹은 듯. 아저씨 해장국 뜨듯 "커어~"하면서 숟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학원 끝나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먹은 자매가 시끌벅적 들어온다.


"손씻고 밥먹어~"


따로 반찬같은 것도 없지만, 얼큰시원뜨끈한 김치콩나물떡국에 코를 박고 먹는 아이들. 만두는 시험삼아 딱 3개만 넣어봤는데, 애들 오기 전에 이미 남편하고 내가 다 먹어버림.


이렇게 저무는 봄날의 저녁.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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