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시작하는 이야기 #28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려온 노래 한 곡에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너무도 낯설어진 풍경이지만,
그때는 음악이 길 위에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런 장면은 꽤나 흔했다.
길을 걷다 마음을 붙잡는 노래가 들리면
자연스럽게 멈춰 서서 한동안 음악을 듣곤 했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자리 잡기 전,
거리에는 이른바 ‘길차트’라는 것이 있었다.
불법 복제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노점상에서
최신 가요와 유행 음악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노래가 좋으면,
그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하나 사 들고
집에 돌아와 다시 듣곤 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가수나 음반 제작자들에게는 분명 해가 되는 일이었지만,
그 시절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적은 돈으로 다양한 음악을 만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때는 길 위에 음악이 있었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거리의 상점마다 캐럴이 흘러나오며
도시 전체가 하나의 축제처럼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저작권 문제가 사회 전반으로 부각되면서,
이제는 거리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풍경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요즘 세대에게는
이어폰과 개인플레이리스트가 익숙하겠지만,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때의 소란스러운 음악 풍경이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물론, 바람직하지 않았던 시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저 ‘그리움’ 일뿐이다.
그 시절에는 라디오도 음악의 큰 창구였다.
신청곡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테이프를 준비해 녹음을 하던 시간도 있었다.
나 역시 80년대 말까지는 라디오를 자주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때는
어디를 가든 주요 라디오 주파수를
자연스럽게 외우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차 안에서는 가끔 라디오를 듣지만,
대부분은 유튜브나 음악 스트리밍을 이용한다.
라디오는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한번 귀를 기울이면
사람 사는 이야기와 온기가 함께 흘러들어오는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 지역 방송에서만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은
더 정겹고, 더 기다려지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 다시 떠올린 영화가 있다.
국민배우 고(故) 안성기 님이 출연했던 영화
"라디오스타"였다.
왕년의 인기가수와 그의 매니저가
지방 라디오 방송국 DJ가 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안성기 님과 박중훈 씨의 연기 호흡은
예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특히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중훈 씨가 직접 부른 노래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젊은 시절부터 영화 음악을 직접 불러왔던 배우이기에
노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영화 속 노래는 유독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비 오는 날이면 특히 떠오르는 노래.
바로 박중훈 씨의 "비와 당신"이다.
이젠 당신이 그립지 않죠 보고 싶은 마음도 없죠
사랑한 것도 잊혀가네요 조용하게
알 수 없는 건 그런 내 맘이 비가 오면 눈물이 나요
아주 오래전 당신 떠나던 그날처럼
이젠 괜찮은데 사랑 따윈 저버렸는데 바보 같은 나 눈물이 날까
아련해지는 빛바랜 추억, 그 얼마나 사무치던지
미운 당신을 아직도 나는 그리워하네
이젠 괜찮은데 사랑 따윈 저버렸는데 바보 같은 나 눈물이 날까
다신 안 올 텐데, 잊지 못한 내가 싫은데 언제까지나 맘은 아플까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삶 곳곳에 남아 있는 그리움들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요즘처럼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하는 시점에 서 있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사람이 아니라,
가끔은 비 오는 날
문득 떠올릴 수 있는 사람으로.
그래서인지,
이 노래는 지금의 나에게
더 깊이 스며드는 것 같다.
길 위에서 멈춰 서게 만들던 음악은 사라졌지만,
노래가 사람의 마음을 붙잡는 힘만큼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음악은 기억을 불러오고,
그 기억은 결국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를 묻게 만든다.
노래처럼,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한 그리움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충분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