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 인생 전반전을 마무리하며..

낡은 명패를 내려놓고, 진짜 하프타임을 맞이하다.

by 시절청춘

지난주 금요일은 제게 무척이나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인생 전반전의 마지막 임무였던 직책을 마침내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길고 긴 휴가를 시작했습니다.

아직 군복을 완전히 벗은 끝은 아니지만, 매일같이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휴대폰을 확인해야 했던 그 무거운 책임감만큼은 확실히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부대 사무실의 넓은 책상에서 가져온 짐들을 집 한쪽에 하나둘 풀어놓으며, 조용히 지난 시간의 흔적들을 쓰다듬어 봅니다.
짐 속에서 나온 중학교 시절의 빛바랜 사진들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추억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나에게도 이렇게 어리고 풋풋한 시절이 있었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나다가도, 사진 속에서 맑게 웃고 있는 친구 하나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생각에 불현듯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본 또 다른 사진 속에는 먼저 전역한 뒤 아등바등 살다가 과로사로 세상을 떠난 후배의 얼굴도 있었습니다.

그 후배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표정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왜 그리 서둘러 떠나야만 했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사진첩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제 사진이 뚝 끊겨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필름으로 찍어 꼭 현상을 했기에 사진첩에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 시대가 오면서부터는 파일로만 머물다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과의 소중하고 즐거웠던 순간들마저 데이터와 함께 희미하게 증발해 버린 것 같아 아쉬움이 남습니다.

앞으로 인생 후반전의 중요한 순간들만큼은 꼭 종이 사진으로 현상해 두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짐들 사이에는 아주 각별한 물건도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제 직책과 이름이 투박하게 새겨진 커다란 나무 명패입니다.
사실 이 명패는 과거 제게 가장 큰 실패의 고통을 안겨주었던 자리에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다시 그 직책을 맡게 되었을 때, 이 아픈 기억이 묻은 명패를 버리고 새것을 만들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낡은 명패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실패했던 그 시절의 아픔과, 더 높은 자리에 선발되지 못해 분노하고 좌절했던 모든 순간을 제 힘으로 정면 돌파해 이겨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저는 이번 임무를 무사히, 그리고 명예롭게 마쳤습니다.

이제 이 낡은 명패는 과거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제 인생 전반전의 자랑스러운 전리품이 되었습니다.


일요일부터는 아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와 머물고 있습니다.

익숙했던 관사를 떠나 다소 낯선 동네와 집에 있다 보니 모든 것이 어색합니다.

딱히 할 일도 없어 하루 종일 뒹굴거리며 브런치와 블로그 글만 들여다보았습니다.

여유를 찾은 것인지, 아니면 아직 이 낯선 여유를 즐길 방법을 몰라 헤매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어제 오후, 창밖으로 느껴지는 초여름 같은 날씨에 이끌려 무작정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스타벅스에 혼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 창가에 앉았습니다.

남들에겐 별것 아닐지 몰라도, 커피 전문점에 혼자 들어가 음료를 마시는 건 늘 머뭇거리기만 했던 제게 꽤 큰 도전이었습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바쁘게 굴러가는 자동차,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느긋하게 블로그 포스팅을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막상 해보니 참 별것 아니면서도 묘한 해방감이 들더군요.

이 달콤한 '혼커(혼자 커피 마시기)'의 여유를 앞으로 종종 애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5월까지는 제 스스로가 휴식을 하려 합니다.

인생 전반전에 늘 꿈꿔왔던 전국 일주를 떠나보려 합니다.

목적지도, 정해진 코스도, 빡빡한 일정도 없습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차를 몰다가 경치가 좋거나 마음이 머무는 곳이 있으면 하룻밤 묵어가며 조용히 글을 쓰는, 그런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혼자만의 낭만을 꿈꿨건만, 아내는 무슨 일이 생기면 119에 신고라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기어코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등 떠미네요.


그러고 보니 아들을 데려가는 것도 의미가 있겠네요.

아들도 자신만의 전반전을 끝내고, 이제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에 다가서 있으니까요.

어쩌면, 둘이서 다시 못 올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찌 되었든 인생 전반전을 마무리하는 지금, 비로소 진짜 하프타임의 휘슬이 울렸습니다.
거창한 욕심 없이, 그저 얽매이는 것 없이 자유롭게 글을 쓰며 소박한 일상을 누리고 싶습니다.

인생 후반전에도 저는 계속 글을 쓸 것입니다.

그 글 속에는 잠시 미뤄두었던 제 군 생활의 치열했던 이야기들도 잘 정돈되어 담기겠지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36년을 쉼 없이 달려온 제 자신에게 건네는 따뜻한 격려와 포상으로서 말입니다.


당분간은 서울과 원주를 오가며 이 낯선 여유를 마음껏 즐겨볼 참입니다.

혹시나 이 하프타임을 200% 만끽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과거의 낡은 상처마저 기꺼이 승리의 전리품으로 안아 들었을 때, 우리 앞에는 비로소 낯설지만 가장 자유로운 하프타임이 펼쳐진다.


《조용필 - 여행을 떠나요》

https://youtu.be/eGC5_DHWPh8?si=P67cymWJtmvoZA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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