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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감사했습니다

by 초록바나나 Mar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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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3월 28일 금요일,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날 늦은 오후에  소장님께서 떠나셨다. 요양원 공사를 마무리하고 췌장암 판정을 받으신 지 9개월 만이다. ‘ㅇㅇ , 오늘 하늘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부고를 확인하던 순간, 얄궂게도 직원들과 소장님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이번 주말에는 꼭 찾아뵈어야지, 꼭 찾아뵈어야지' 되 뇌이던 다짐이 허공 속에 먼지처럼 흩어졌다.


    2016년 겨울로 기억된다. 운영 중인 요양원 증축 공사를 준비할 때 처음 소장님을 뵈었다. 흙먼지를 털며 성큼 들어서는 큰 키의 노인을 마주하고 적잖이 당황했었다. 현장에서 바로 오셨는지 온몸에 노동의 흔적과 한기가 묻어났다. 얼굴을 뵈니 칠순은 족히 넘기셨을 것 같았다. 공사판을 누비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보여 애잔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분이 몰고 온 한기는 사라지고 편안함과 온기만 남았다. 소장님께서는 건축에 대해 무지한 나의 걱정거리들을 들어주시고는 일의 순서와 필요한 고민들을 골라 주셨다. 어려운 게 당연하다며 막막함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시고 그 두려움에 기꺼이 동참해 주시겠노라 말씀하셨다. 그날 상담실에서 해 주셨던 이야기들은 공사를 하는 내내 기준이 되고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건설사를 결정하기 전 날 늦은 밤이었다.  더 저렴한 건축비를 제안하는 젊은 사장을 제쳐 두고, 소장님이 사시는 광주까지 찾아갔었다. 소장님의 생각을 더 듣고 싶어서였다. 저렴한 건축비의 유혹은 달콤했지만 소장님을 한 번은 더 뵙고 결정해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무례할 수 있는 갑작스런 방문에도 소장님은 흔쾌히 달려 나와 반겨주셨다. 그 어른의 눈빛을 마주했을 때 바로 알아차렸다. 어르신들을 모시는 우리 집은 이런 분이 지어주셔야 된다는 것을. 대화를 시작도 하기 전에 진심 어린 그분의 환대에 감동이 밀려왔다.

   소장님은 그런 분이셨다. 조금만 옆에 있어보면 덩달아 옆 사람까지 순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분의 손을 잡고 공사를 시작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세월을 품은 깊은 지혜와 성실함에 기대 고비를 넘고 넘었다. 그리고 이렇듯 반듯하고 아름다운 집을 완성했다. 소장님은 두려움과 걱정에 작아져 있던 내게 찾아온 선물이었고 그 선물을 알아본 나는 최고로 운이 좋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살면서 소장님처럼 훌륭한 인품을 지닌 분을 만나보지 못했다. 딸뻘은 족히 되는 내게도 극존칭을 쓰셨다. 나이와 지위를 떠나 그가 누구더라도 하대를 하는 법이 없으셨다. 본인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겸손과 배려가 뼛속까지 배어 있었다. 투덜거리는 사람을 만나면 “제가 조금 더 신경 쓰겠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먼저 고개를 숙이니 화낸 사람이 무안해지기 일쑤였다. 많은 거래처와 거친 인부들을 관리하던 일 년 가까운 기간 동안 무턱대고 큰소리 내시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일꾼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쓰레기를 치우고, 무거운 짐을 같이 들어주셨다. 어디 그뿐이랴. 하늘이 두 쪽 나도 일꾼들의 일당은 미루지 않고 챙기셨다. 그런  소장님이 계셨기에 거친 공사 현장엔 환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공사 끝 무렵 한 우즈베키스탄 청년이 일하러 온 적이 있었다.

   " 원장님 이 젊은이가 어찌나 일을 잘하는지 몰라요. 동생을 데리고 있다는데 참 착하고 성실해요. 내일도 나오라고 해야겠어요"

기죽지 말라고 등을 토닥이시는데 투박한 손등을 타고 온기가 돌았다. 덩달아 말도 통하지 않는 그 이방 청년에게 눈인사를 건네게끔 마법을 거셨다.

젊은 사람들은 따라가지 못할 만큼 부지런하셨고, 오래 참으셨고 그 선한 마음이 강물처럼 흘러넘쳤다. 공사를 하는 내내 '어른이 된다는 건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구나' 느끼게 하셨다. 지금도 바람에 그을린 주름진 얼굴과 노동으로 단련된 거친 손마디로 성큼 요양원 문을 밀고 들어오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검소가 뚝뚝 묻어나던 낡은 작업복에 듬성듬성한 흰머리가 유리창 너머로 비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기존 건물과 수평으로 연결하는 증축 공사였기에 80분이 넘는 분들을 모시고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조그만 소음에도 민감해지기 일쑤였다. 보호자들의 항의를 받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공사와 관련이 없더라도 건물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소장님부터 찾았다. “소장님 3층 문틀 좀 봐주세요!" “소장님 온수가 갑자기 안 나와요” “소장님 4층 전기가 안 들어와요” “소장님, 소장님, 소장님…….” 공사하는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수 없이 소장님을 부르고 또 불렀다. 하지만 그때마다 단 한 번도 ‘싫다’ ‘안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제가 한 번 가 볼게요. 원장님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사람 보내서 확인할게요."  “해결 방법을 찾아볼게요…….” 스치듯 던진 한 마디도 지나치지 않고 기억하셨다가 요술 할머니처럼 뚝딱 해결 방법을 찾아주시곤 했다. 그러다 보니 소장님이 외부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 모두의 소장님이실 뿐이었다. 그냥 우리 중 당연한 한 명으로 분주히 뛰어다니시던 그 구부정한 어깨에 참 오래도 매달려 있었다.

   

    내 것인 양 아껴 주시려고 수고를 마다치 않으시던 고민들이 건물 곳곳에 남아 있다. 어르신들이 다니는 길목마다 핸드 레일을 설치할 때도 그랬다. 사람을 불러 설치하려니 돈 백은 족히 더 든다며 재료를 사 와 손수 재단하여 부착해 주셨다. 알루미늄 바를 pvc 소재로 감싸는 방식이었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잘 들어가지 않는 pvc를 가지고 얼마나 씨름을 했는지, 레일을 쥐지 못할 정도로 부르튼 손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처음부터 손이 덜 가는 조금 더 비싼 재료를 사용했으면 좋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하다 보니 이젠 나름의 요령을 터득하셨다면서 걱정 말라고, 괜찮다고, 걱정시켜 미안하다고 하셨다. 소장님의 일 하는 방식은 늘 그랬다. 조금 바보 같고 조금 답답하고. 그렇지만 본인이 할 수 있는 진심을 다 하셨다. 좀 더 싸고 좋은 것을 찾으러 발품을 마다치 않으셨고, 그 이익은 고스란히 내게 돌려주셨다. 건설에 문외한인 나를 대신해 여러 업체들과 조율하고 흥정하며 발품을 팔아 아껴주신 공사비가 적지 않았다.

   

    공사가 한창이었던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유난히 혹독하게 추웠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혹여나 안전사고라도 날까 발을 동동 구르시던 소장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컥 눈물이 올라온다. 그 매서운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공사 기일을 맞추려고 부단히 애를 쓰셨다. 소장님이 아니었으면 그 추위에 그렇게 차분히 공사를 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춥지 않다’ ‘괜찮다’ 하시며 주차장 앞쪽 도로를 서성이던 소장님의 잰걸음이 한발 두발 쌓여 겨울이 갔고 봄이 왔다.

   

    소장님과 함께 한 작업들이 모두 즐거웠지만 그중에도 조경 공사를 할 때의 설렘을 잊을 수 없다. 함께 정원 울타리를 그리고, 나무를 고르고, 꽃을 심던 그 순간들, 소나무를 심고 나서 그 운치에 흡족해 미소 지으시던 모습, 옥상에 나무 데크를 깔 때 가장 경제적인 조합을 찾았다며 손 때 묻은 모눈종이를 들고서 으쓱해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원장님,  정원 관리가 생각보다 재밌어요.” 하시면서 사 주신 정원 가위는 창고에서 원래 주인을 잃은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잔디 깎는 법도, 가지치기하는 법도, 가뭄에 물 주는 법도 소장님께 배웠다. 생명을 가진 것들이 아름답다는 그 흔한 이야기를, 꽃이 피고 잎이 푸르러 가는 정원의 비밀을 따뜻한 눈빛과 미소로, 그 무딘 손으로 느끼게 하셨다.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 요양원 부원장과 근처 식당으로 국수를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점심때였는데 각별한 후배였던 전기 사장님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계셨다. 그날의 나처럼 무슨 힘든 일이 있으셨던 것 같았다. 뜨거운 국수는 줄지 않았는데 소주잔은 채워져 있었다. 식당에서 뵈니 더 반갑다며 얼른 밥값을 계산해 드렸더니 기분 좋게 “원장님 잘 먹었습니다.” 하고 웃으셨다. 잘 먹었다는 소장님의 환한 한마디에 구겨졌던 내 기분까지 좋아졌다. 존재 만으로도 위로할 수 있다는 걸 그분을 통해 알게 됐다.  잠깐 소장님을 뵈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많은 문제들이 그냥 해결되곤 했다. 그렇게 주고 또 주시는 분이었지만 작은 호의를 기쁘게 받아주실 줄도 아시는 소장님이 참 좋았다. 요양원 행사가 있을 때 드렸던 콩떡을 받으실 때도, 시장 다녀오며 사다 드린 오렌지 한 봉지를 받으실 때도 그랬다. 그 큰 어른이 조그만 종이봉투를 들고 느릿느릿 걸어서 퇴근하시던 뒷모습이 석양의 노을처럼 뭉클했다.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집사람이 잘 먹었답니다. 원장님 참 잘 먹었어요." 인사를 건네셨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께 칭찬을 받듯 행복해졌다.

   

    2년 반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소장님을 만나고 함께 일을 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소장님의 낡은 자동차가 나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과처럼 함께 차를 마시고, 그날의 일정을 의논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고민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살아야 할 사람과 짓는 사람 간의 수많은 교감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 매일매일이 증명했다. 공사가 끝나가고 더 이상 나오지 않으셔도 된다는 것을 자각했던 즈음, 그 당연한 일과가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소장님이 안 계신다는 불안감도 컸지만 공사가 끝나갈 무렵부터 식사를 잘 못 드시는 게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어떤 느낌이 있었던 것인지, 뵙기만 하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70 평생 건강을 자신하며 일만 해 오셨다는 소장님께 ‘건강 챙기시라, 쉬엄쉬엄 이젠 휴가 좀 가시라’ 며 주제넘은 잔소리를 여러 번 했다. 


   공사가 끝나도 더 깊은 인연으로 남아 주실 거라 믿었던 기대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며 그때의 잔소리처럼 허물어졌다. 췌장암 진단을 받고 해쓱해진 모습으로 찾아오신 2018년 7월, 이렇게 말씀하셨다. 

   “원장님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정말 감사해요. 공사를 모두 끝내고 이렇게 돼서 어찌나 감사한지요. 어젯밤에 집사람하고 정말 다행이라고 서로 얘기했답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주셨어요.” 

   그러시면서 또 괜찮다고 하셨다. 요양원 운영위원을 맡아주기로 하신 일을 언급하시며 회의 때는 꼭 불러주셔야 한다고 농담도 건네셨다. 소장님은 기도하는 분이시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거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내가 초라해졌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그런대로 시원해졌군요. 저는 잘 쉬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의 미소 가득한 모습을 그리다 보면 마음의 힐링이 됩니다. 태풍이 온다지요? 가서 챙겨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옥상 배수구 한 번 확인해 주세요. 조만간 모자 쓴 모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2018년 8월 22일 소장님의 문자를 받고 울었다. 나는 때마침 휴가를 가느라 공항에 있었는데 항암 치료 중이던 소장님의 문자에 혼자만 훌쩍 떠나는 것 같아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가을이 시작되던 그 해 9월과 코끝이 시렸던 12월에 운영위원회에 참석하신 소장님을 뵈었다.  모자에 감추인 성글어진 머리카락과 부은 손마디 사이로 위로할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직감했지만 다음을 약속하며 손을 잡았다. 참 따뜻했다.


     2019년 1월 중순, 항암치료를 끝내고 얼마 안 돼 많이 안 좋으시다는 연락을 받고 뵈러 갔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어둠이 밀려오는 시각이었다. 병실 명패에서 성함을 확인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침대에 앉아 계시던 소장님께서 나를 보시더니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셨다. 내 손을 잡고 그 큰 어른께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거기 머무는 내내 소장님은 눈물이 멈추지 않으신다며 연신 우셨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드리며 가만히 흔들리는 어깨를 안아드렸다. 가슴이 아렸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날의 눈물의 의미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삶의 끝에서 그 생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어린 동료에게 그 보다 더 애틋한 이별의 인사를 전할 수 있었을까! 함께 울어 주신, 내 대신 더 애닯게 울어 주신 소장님께 감사했다. 그 와중에도 요양원의 안부를 묻고, 직원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나의 건강을 염려하셨다.

  “요양원은 잘 되시죠? 원장님과 선생님들이 선한 마음으로 하시니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거예요. 항상 요양원 위해서 기도할게요. 원장님 건강 잘 챙기세요.”

요양원을 축복하시고 나를 위로하셨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뵈었다. 소장님께 드리려고 차 뒤쪽에 싣고 다니던 뉴케어 한 박스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고 아무것도 해 드린 것 없이 죄송한 마음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뵙고 돌아온 지 한 달쯤 지났을까? 또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ㅇㅇ요양원이 날로 발전하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저를 잘 챙겨주신 원장님과 직원 분들의 배려에 늘 감사한 마음 가슴에 담고 지낸답니다. 저의 요즈음 상황으로는 앞으로 운영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힘들 것 같습니다. 직원들의 따뜻한 마음과 원장님의 사랑 속에 ㅇㅇ요양원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주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증축 감사예배를 드리고 소장님의 손을 잡았을 때도 늙은이 잘 돌봐줘 고맙다고 하셨다. 연신 고맙다고 하셨다. 애써 주신 소장님을 생각하며 목이 메어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던 내게 또 다가와 고맙다고 하셨다. 고마운 분은 소장님이신데, 인사를 받고 위로를 받고 칭찬을 받으실 분은 소장님이신데 그 모든 공을 다른 이에게 돌리시고 되레 고맙다고 하셨다. ‘참 감사했다’는 마지막 인사가 사무치도록 서러워 또 눈물이 났다.

   

    내게 소장님은 그저 그런 노인이 아니셨다. 늘 내가 가야 할 길에 먼저 가 계신 고마운 분이셨다. 친구이고 동료이며 스승이고 아버지셨다. 나는 이곳, 우리 요양원을 어르신들의 마지막 집이고 성전이라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들의 마지막 친구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키는 고귀한 일이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그런데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소장님의 마지막 파트너가 되어버렸다. 많은 순간 그 커다란 축복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훌륭한 분의 마지막 파트너였다는 것이 감사했지만 이별은 너무 힘들고 아팠다. 자다가도 울었고, 걷다가도 주저앉아 울었다. 소리를 내어 울기도 하고 숨죽이고 흐느끼기도 했다. 참 고마웠다는 마지막 문자를 지우지 못하고 읽고 또 읽었다.

   

    떠나시고 아주 긴 날들을 엄마 잃은 아이처럼 소장님을 기다렸다. 출근길이면 늘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소장님의 낡은 자동차가 저만치 보이는 것 같았다. 차창 너머 눈부신 햇살이 꼭 그 어른의 따뜻한 마음 같아서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내게 그랬던 것처럼 소장님께도 선물 같은 시간이었을까? 내가 그분의 마지막 삶에 보람과 위로가 되어 드렸을까?'

  여러 번 그분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거꾸로 돌려보곤 했다.

  얼마 전 소파에 앉아 울먹이던 내게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슬퍼하는 걸 보니 소장님은 참 잘 사셨네. 한 사람과 이렇게 깊이 자주 소통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야. 그 어떤 친구와 보낸 평생의 시간보다 깊고 의미 있었을 거야."

  울고 있던 내가 미소 지었다. 요양원 창문 너머로 듬성듬성한 흰머리를 발견하곤 미소 짓던 그때처럼. 나도 그렇게 소장님을 내 삶의 아주 따뜻한 기억으로 가슴에 담기로 했다.

    

   소장님은 건축을 끝내고 소회를 말씀하시며 어떻게 하면 노인들이 편하게 쓰실까? 춥지 않고 덥지 않게 잘 지을까 생각하셨다고 했다. 바깥에 나가기 어려운 분들이 좀 더 넓고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창문을 만들 때도 천정을 높일 때도 고민하셨다고 했다. 우리 요양원은 그 반복된 고민과 밤잠을 설치며 그리고 또 그리신 그분의 마지막 프로젝트다. 당신의 검소함, 성실함, 부지런함을 그대로 담은 그분의 유작이다. 소장님은 짧고도 깊은 인연과 이곳을 아름답게 가꾸고 지켜나가야 할 숙제를 남기시고 굵고 뜨거웠던 육신의 삶을 벗으셨다. 짧은 투병만큼이나 아쉬움과 슬픔을 남기셨지만 결이 다른 인품처럼 위로와 축복을 남기고 떠나셨다.

   

    늙고 병들고 약해진 노인들의 마지막 집을 지으시고 가야 할 길을 미리 아셨던 것처럼 담담하게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나신 소장님을 추억한다. 소장님께도 행복한 작업이었기를, 말씀처럼 나와 우리와 함께 했던 시간이 그분의 마지막을 미소 짓게 만들었기를..... 그리고 나지막이 불러본다. 

    ‘소장님, 고마우신 소장님..... 참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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