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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별에서 오셨을까요, 이토록 사랑스러운 당신은..

우리 가족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by 초록바나나

“당신의 작은 손길, 짧은 노래, 환한 미소가 이곳을 조금 더 다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느 별에서 오셨을까요, 이토록 사랑스러운 당신은.

우리의 가족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민체조를 기억하시나요?

모르면 간첩이라는, 아니 간첩도 이 체조는 알고 있을 것 같은, 모두에게 익숙한 추억의 체조입니다.

"짜자잔~ 짜자자잔, 짠-짠-짠-짠-, 국민체조 시~작~"


경쾌한 음악과 함께 운동장에 울려 퍼지던 학창 시절의 아침 조회 시간이 떠오릅니다. 어디 학교뿐이겠습니까? 군부대 연병장에서, 건설현장에서, 직장의 구내방송에서까지... 전 국민의 아침을 깨우던 소리였습니다.


세월 따라 덩더꿍 체조, 새천년 체조, 건강체조 등 새로운 체조들이 생겨났지만, "하나, 둘, 셋, 넷" 우렁찬 구령과 함께 몸에 배어든 국민체조의 아성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요양원의 아침은 아직도 이 국민체조로 시작됩니다.


매일 아침 9시 정각, 익숙한 멜로디가 울려 퍼지면, 요양원 가족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체조를 시작합니다. 양팔을 뻗고, 가슴을 펴고, 좌우로, 위아래로 몸을 흔들며 지난밤의 꺼풀을 걷어냅니다. 굳은 관절들이 만들어내는 사각거림과 함께 이곳의 하루가 다시 시작됩니다.


"그쳐~~"

마지막 구령이 끝나면 다 함께 박수를 치며, 서로의 하루를 축복하고 격려합니다. 굽었던 등도, 밤새 눌려 있던 뻐근한 마음도 새로운 아침과 함께 활짝 펴집니다.


그 체조의 대열 속, 유난히 눈에 띄는 한 분이 있습니다. 작고 가느다란 팔을 누구보다 힘차게 들어 올리고, 동작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아 따라 하시는 분. 올해 아흔여덟, 아주 오랜 시간을 꿋꿋이 걸어오신 어르신입니다.


오늘 저는 그분을 만나러 갑니다.

입소하신 지 3개월이 되어가는 어르신의 근황을 여쭙고, 살아온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어르신을 처음 뵙던 날이 떠오릅니다. 140cm 남짓한 작은 키에 동그란 얼굴, 발목까지 내려오는 남색 꽃무늬 원피스를 살랑대며 작은 보폭으로 걸어오시던 모습이 꼭 엄지공주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노모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딸의 눈엔 미안함과 걱정이 어려 있었지만, 어르신의 얼굴엔 긴장을 숨기고 싶은 잔잔한 미소가 떠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처음 입소하시는 날엔 많은 직원들이 마중을 나가 따뜻한 인사를 드립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참 잘 오셨어요. 반갑습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어르신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어르신의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따뜻하게 안아드립니다. 낯선 곳, 낯선 이들에게로 오시는 그 순간이 얼마나 두려울지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 순간만큼은 꼭 '환영받고 있음'을 느끼시길 빕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심이 어르신의 마음 문을 열어주는 그 "휴~"하는 순간을 수없이 마주합니다. 슬그머니 긴장이 녹아내리며, 편안해지는 어르신의 모습을 뵈면 우리도 함께 안도하며 행복해집니다.


그날, 어르신께서도 많은 직원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요양원 문턱을 넘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 어르신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입소 기념사진을 찍고 난 직후였습니다.


"개나~리 우물가에 사랑 찾는 개나리 처녀~”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곁들인 흥겨운 노래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반겨줘서 고마워요"

활짝 웃으시며 노래로 인사를 건네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르신의 슬기로운 요양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상냥한 말투, 귀여운 미소, 흥겨운 장단이 어우러져 이곳의 작은 엄지공주, 요양원의 마스코트가 되셨습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뭐 하고 계세요?"

"아구머니나, 어쩐 일이여~"

침대 발치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어르신께서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어르신 뵈러 왔죠!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서요~"

"허허허, 나야 뭐 그냥 이러고 지내지. 그냥 왔다~ 갔다~ 하면서 살지."


창문 너머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이 어르신을 향해 정답게 손을 흔듭니다.


질문도 필요 없을 정도로, 어르신은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십니다. 그리운 고향 이야기부터, 자식들 키우던 날들, 그리고 눈물로 지새운 시간들까지...


"저 나무 좀 봐. 참 좋아. 내 고향은 평택인데, 저런 나무 하나 볼 수 없이 너른 들판이 쭉 펼쳐져 있었어."

"위로 오빠가 셋이 있었어. 딸은 나 하나였는데, 오빠들만 읍내로 보내 공부를 시켰어. 여자가 무슨 공부냐면서 학교도 안 보내줬어. 클 때까지 심부름만 하고 밥만 했지 뭐야. 하도 억울해서 나중에 애들을 낳으면 아들은 그냥 두고 딸만 가르쳐야겠다고 다짐도 했었다니까... 허허허"


어르신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훤칠하고 잘생긴 강원도 청년과 결혼해 횡성에서 살게 되셨다고 합니다. 막상 자식을 낳아보니 어르신 또한 아들이 더 신경 쓰이고 위하게 되더랍니다. 그런데 결국 인생 말년에는 딸 신세를 지다가 요양원에 오셨다면서 껄껄껄 웃으셨습니다.


저 조그마한 체구로 남편과 자식들을 돌보며 과일 장사를 하고, 손주들도 여럿 키우셨다고 합니다. 몇 해 전, 의지하던 막내아들과 큰 며느리를 앞세우는 커다란 슬픔도 겪으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라며 사연을 풀어놓으시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요양원 생활이 어떠시냐고 여쭈었더니 씽긋 웃으며 대답하십니다.

"아이구, 너무 편하고 좋아. 눈치 볼 것도 없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그게 말이야, 늙으니까 자식도 어려워. 첨엔 딸이 나를 버렸구나 싶어 서운하기도 했는데, 좀 지나 보니까 여기 오길 참 잘했어. 뜨뜻한 밥에, 심심하지도 않고, 세상 좋아."


그 조그만 손으로 내 손을 잡고는 고맙다고 토닥여 주시는데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자식 집보다 편하고 좋을 수는 없겠지만... 그 말씀이 진심이라 믿고 싶습니다. 아니, 진심이겠지요.


어르신의 이야기는 조근조근 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키 크고 잘생긴 남편 자랑이 일품입니다.


어느 날 남편 친구 하나가 빈정대며 물었답니다. "자네는 어디서 이렇게 쪼끄만 사람을 데려왔어? "


그랬더니 남편분께서 큰 소리로 받아치셨답니다.

"내가 큰 사람하고 결혼하든 작은 사람하고 결혼하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야?"


그 말씀이 그렇게 고맙고 좋으셨다고,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웃으십니다.


" '내가 어쩌다 저렇게 작은 여자를 만났지?'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내편을 들어줬어. 그게 그렇게 고맙더라고. 허허허"


그 말 한마디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오신 어르신, 도란도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렇게 상냥하고 귀여운 아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 사랑스럽고 어여쁩니다.




워커를 밀고 자박자박 걸어 나와 손을 흔드는 어르신과 헤어지며, 마음속에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받아 안은 듯했습니다.


맛있게 드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게 노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흥겹게 춤장단을 맞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침마다 힘차게 국민체조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가족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백년도 더 오래전, 툭 던져졌던 남편의 말 한마디, 고향 벌판의 시원한 바람 한 줌, 그리고 모든 일을 강물처럼 흘려보낼 줄 아는 여백.

아흔여덟, 어르신의 삶을 채워온 아름다운 풍경들입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어르신은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오신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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