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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걸어온 길, 이대로 좋습니다.

마지막 이야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은 날>

by 초록바나나

비 내리는 한가위,

어르신들의 하루와 나의 하루가 닮아 있음을 깨닫는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고맙고 풍요롭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은날"


무르익는 들판의 곡식과 열매, 식탁을 채운 풍성한 감사.

사람의 마음이 가장 둥글어진다는 달의 계절이다. 안타깝게도 연일 흐리고 비가 내린 탓에 올해는 밝고 환한 보름달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평안과 고요가 대신하며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잔잔함이 머물고 있다. 달빛에 밀리지 않는 이 마음이 가을비를 맞으며 짙어져 간다. 연휴에도 계속된 근무로 쉼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바쁘게 달려온 걸음들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다. <은빛 지붕 아래>의 마지막 이야기를 써 내려가며,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하루를 돌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하루, 그런 인생을 바라는 이 짧은 문장은, 어쩌면 삶의 본질을 가장 단순하게 꿰뚫는 말일지도 모른다. 단지 풍요로운 명절을 빌던 인사말이 아니라, 삶의 적정 온도와 균형을 지켜내고자 했던 이들의 바람이 담겨져 있다.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 이른 지금도 어르신들은 말없이 그렇게 오늘을 살아내신다. 여전히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노래하는 그들 덕분에 내 삶이 냉탕과 온탕 사이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은빛 머리 위에 깃든 풍요를 발견하는 모든 날들이 한가위 같았다.




솔직히, 이번 명절의 긴 연휴가 달갑지 않았다. 365일,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야 하는 요양원의 시계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기저귀를 가는 누군가의 손과 발에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세상은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다. 때론 가족들까지도.


명절, 긴 연휴의 당직 근무표를 짤때면 배려하고 양보하며 휴일을 반납하는 직원들에게 매번 감동한다. 근무표에 가족 일정을 맞추는 요양보호사 선생님들, 면회가 없는 분들의 무료함을 달래 드리기 위해 연휴에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복지사 선생님들, 특별히 명절 음식을 준비하며 몇 배로 애쓰는 주방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요양원의 일상이 어르신들의 편안한 삶으로 이어진다.


올봄에 사위를 맞은 간호과장님을 배려해 명절 근무를 자처한 간호과 선생님들, 근무가 아닌데도 살그머니 와서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고 돌아가신 관리과장님, 아픈 동료를 대신해 추석 아침상을 차리다 말고 뛰어온 젊은 요양보호사의 상기된 얼굴이 겹쳐진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수고하는 그들이야말로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다. 한가위의 풍요로운 빛깔은 이미 그들을 통해 넘치게 흐르고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민족의 대이동'이 요즘은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하지만 역시 명절은 명절이다. 특히 추석날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면회 온 가족들을 맞으며 몹시 분주했다. 비가 내린 탓에 외출을 예정했다가 면회로 변경하신 분들이 여럿 계셔서 다른 추석보다도 더 북적였다. 오늘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르신들께는 말 그대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은' 좋은 날이다.


면회의 모습은 가족마다 참 다양하다.


삼 형제를 두신 이어르신은 결혼한 손주들과 증손주까지 10명이 훌쩍 넘는 대가족이 찾아왔다. 자녀들을 알아보지는 못하시지만 어르신이 계시기에 가능한 진정한 가족의 날이다. 오가는 대화 속에 간간이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마저 정답다.


완전 와상으로 침상에서 면회를 해야 하는 김어르신 가족들도 많이 찾아왔다. 같은 방을 쓰는 어르신들을 배려해 나누어서 면회를 하는 불편함을 이해해 주셔서 무척 감사했다.


오매불망 아들만 기다리는 정어르신의 자랑스러운 외아들도 다녀가셨다. 일 년에 딱 두 번 명절에만 오시는데 어찌 된 일인지 늘 혼자, 터덜터덜 빈손이다. 그런데도 어르신은 변함없이 아들 자랑이다. "우리 아들 아나? 우리 아들이 서울에서 아주 잘 나간다더라" 어머니의 이 마음이 오늘 같은 날엔 더 애잔하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과자 한 봉지만 들고 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빈손보다 더 서운한 것은, 그리움을 모른 척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입소하신 지 한 달이 채 안 된 김어르신은 가족들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신다. 갑작스러운 골절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요양원으로 오셨는데 어르신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얼마 전까지 집에서 혼자 생활하며 노인정에도 다니시던 분이 이렇게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셨으니 말이다. 그래도 눈물을 꾹 참고 손자 손을 토닥이시는 모습이 영락없는 할머니다. 마음을 진정시키시고 긴 시간 면회를 잘하셨다. 방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쇼핑백에 담긴 가을옷 꾸러미를 안고 한숨을 쉬시는데 참 마음이 아팠다.


빨간 가디건을 곱게 입고 딸을 만나러 내려오신 최어르신은 오늘 유난히 고우시다. 며칠 전 화장실에 가시다가 살짝 주저앉으셔서 걱정을 좀 했는데 다행히 크게 아프신 데는 없다고 하신다. 따님은 잡채, 전, 미역국까지 어르신이 좋아하시는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어떻게 이리 맛있게 했니? 참 고맙다" 어르신께선 연신 딸에게 고맙다고 하신다. 따님 말씀으론 치매가 오고 나서 어머니와 훨씬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잔정이 없던 엄마가 자꾸만 고맙다고 하셔서 신기하다는 것이다. 어르신은 평소에 우리에게도 고맙다는 말씀을 정말 많이 하신다. 뭐가 그리 고맙냐고 되물으면 "이리 이쁜 사람들이 이렇게 잘해 주는데 안 고마우면 되나?" 하신다. 오늘은 고맙다는 말씀 끝에 급기야 입고 오신 빨간 가디건을 나중에 늙으면 휠체어를 밀어준 나에게 물려주신다고 약속도 하셨다. "나중에 늙으면? 하하하" 따님과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아들 집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귀원하시는 조어르신은 포도 한 송이를 들고 오셨다. 어르신 얼굴만큼 커다란 포도송이를 열어 보이며 나에게 손짓을 하신다. "먹어봐~ 맛있어" 자꾸만 먹어보라고 하셔서 한알을 떼어먹었다. 파란 알맹이에서 단맛이 '톡'하고 터졌다. 한알은 서운하다며 또 한알, 어르신의 마음이 포도송이처럼 크고 달콤했다. 하루의 피곤이 사라지는 맛이다.


분부했던 하루를 보내고 가을을 재촉하는 세찬 빗속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반가운 얼굴들이 흔들리는 와이퍼처럼 손짓하며 따라왔다. 긴 여운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하루였다. 웃음꽃 피는 면회 중간중간, 충전이 안된 어머니 전화기 문제로 짜증을 내는 보호자도 있었고, 입고 온 어머니의 바지가 얇다고 타박도 들었다. 사이가 나쁜 남매가 오전과 오후 번갈아 면회를 하며, 서로 다른 요구를 전해 와 당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한 데 버무려지며 만든 오늘의 마지막 인사는 '그래도 감사'이다.


말 한마디 못하는 어머니 곁을 지키다 눈물을 훔치고 가는 아들의 뒷모습과 두 시간 넘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찾아온 딸의 손에 들린 묵직한 간식 꾸러미에 사랑이 녹아있다. 자녀들을 만나는 어르신들을 단장해 드리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선생님들의 손길과, 오색 한과와 식혜가 담긴 하얀 간식 종지 위에 정성이 내려앉는다. 보호자가 건네준 음료수 상자와 따뜻한 인사에, 어르신이 떼어 주신 포도 한 알에 송글송글 감사가 맺힌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만족이 가득한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간다.




더 젊을 수도, 더 건강할 수도 없지만 지금 이만큼 살아내며 어머니의 자리를 지키고 계신 어르신들께는 이미 모든 날이 한가위가 아닐까 싶다. 더 가지려 애쓰지도, 덜 가졌다고 아쉬워하지도 않는 마음, 지금 있는 것에 감사하고, 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진짜 '풍요로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작은 식판 위에 나란히 놓인 반찬들, 느릿한 걸음 끝에 찾아오는 따뜻한 안부,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피어나는 웃음, 때로는 소란과 다툼까지도... 그 모든 것이, '한가위만 같은 날'이란 말의 다른 얼굴처럼 느껴진다.


<은빛 지붕 아래>, 요양원의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며 나에게 주신 이런 풍요를 나눌 수 있어 감사했다.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하며, '조금 더, 조금만 더...'를 향해 달려온 나에게 '지금 이 순간, 이미 충분하다'는 삶의 지혜를 일깨우는 시간이었다.


과로가 일상인 내게 한 주에 한 편의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누군가의 삶을 훔치는 것 같은 죄스러움도 있었고, 나를 드러내야 하는 용기도 필요했다. 다듬을 새도 없이 내어 놓는 이야기들이 초록바나나의 아린 맛처럼 씁쓸했다. 나의 글들이 언제나 부족함과 미완의 연속인 돌봄의 현장을 미화하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산고 끝에 만나는 아이의 울음처럼, 벅찬 마음으로 연재를 마무리한다. 어르신들과 함께 한 소중한 날들을 모두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 무엇보다 나를 위로하고 성장시킨 여정이었다. 이곳을 채운 웃음과 눈물, 기도와 노래, 편지와 추억... 그 모든 순간과 돌봄의 기록은 움직이는 삶의 선물이 되었다.


연재는 여기서 마무리되지만, 어르신들의 삶과 그 안에서 펼쳐질 새로운 이야기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이야기들이 더 따뜻하고 아름답게 이어지길, 작고 착한 돌봄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에 울림이 되고 감동이 되길 빈다.


나는 다시 삶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도....


가을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물어 갈 들녘의 곡식처럼, 익을 대로 익은 말들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고개를 숙인다.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겠지만, '이 가을에 품은 마음'과 '오래 익힌 말'들만큼은 오래도록 곁에 머물기를 기도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하루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은 날이기를.



<감사 인사>

연재의 여정을 함께하며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은빛 지붕처럼 따뜻한 그늘이 오늘, 사랑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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