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책

내가 할 줄 아는건 읽기 뿐인데 너무 많은 걸 주는거 아닌가요?

by 하빈

미친 듯이 회사가 가기 싫었던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님은 얼마 있으면 퇴사하실 거예요?"

오전 커피타임의 단골 주제가 또 등장했다.


"저는 50억이요"

"히엑, 그렇게 많이요? 저는 10억이요"

"10억 너무 적은 거 아니에요? 집도 못 사요"

"지방 근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자자, 그 돈을 그대로 은행에 넣었을 때~"


거의 매일 나오는 주제인데, 왜 늘 새로운지

요즘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시간이 너무 힘들어서일까,

그날따라 진지했던 나는 책상에 앉아 엑셀을 켰다.

지금만큼의 월급을 얼마나 더 받아야 회사를 그만둘 수 있지?

일단 40세에 퇴사하는 파이어족이 되는 목표를 세웠을 때

지금처럼 쓰면 몇 살까지 살 수 있지?

...(일찍 죽어야겠는데?)

아니, 50세까지만 더 일한다고 치고!


그렇게 계산기를 두드리다 문득

친구의 지인이 창업을 하기 전에 [[나는 한 달에 얼마간의 수입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지출 최소 실험을 진행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어떨까? 나는 한 달에 얼마만큼의 수입으로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렇게, 퇴사 밸런스 게임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내 2주간의 프로젝트가 되었다.


고도로 발달한 거지는 환경운동가와 구별할 수 없다고 했던가.

엄마가 어디선가 얻어다 준 옷을 연달아 입고, 라면을 주식으로 삼았다.

데이트는 역시 공원이 최고다. 카페인도 자연스럽게 끊겼다.

그리고 매일 아침 일기를 쓰며 내 삶을 체크했다.

내 아침 일기에는 감사 일기도 포함되어 있는데, 지출 최소 실험을 하는 동안

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따뜻한 물을 마실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색이 있는 양말을 신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헬스장을 등록하면 샤워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세상에 이 헬스장은 샴푸도 있네요!)

내 감사일기는 세상 작은 것으로 가득 채워져 갔다

그리고 유난히 다음 구절이 많아졌다.


돈이 없어도, 책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친구와의 약속을 줄이고, 클라이밍과 같은 많은 취미 생활이 축소되었지만

감사하게도 내가 사는 곳의 시립 도서관은 늘 열려있었다.

나는 거지가 되어도,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그 시간들은 나를 가득 채워주었다.


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더 의외였다.

내가 책을 이렇게 좋아했었나?


어렸을 때는 확실히 책을 좋아했다.

그때도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는 책세권이었는데,

한 번에 5-7권의 책을 빌려와 쌓아 두며 읽었다.

나는 굉장히 내향적이라, 새 학기만 되면 울상 지으며 집에 돌아오던 학생이었는데

책을 읽을 때는 그런 부끄러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이야기 속에만 빠질 수 있었다. 출근한 부모님, 학원에 간 오빠가 없는 적막한 집에서 TV나 컴퓨터를 켤 줄 모르는 어린 나에게 책은 너무나 좋은 친구였다.

어렸을 때 책을 좋아하면 좋은 점 중 하나는 어른들이 한없이 칭찬한다는 것이다. 나는 책만 읽어도 엄마의 자랑스러움이 될 수 있었다. 난 필독도서에서 무협지, 인터넷 로맨스 소설로 그 범위를 확장하면서도 엄마에게 칭찬받을 수 있었다. 엄마 몰랐지 내가 미안

근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책을 좋아하는 것이 더 이상 칭찬받기 어려워졌다. 공부가 더 중요해졌고 그건 부모님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들지 않고 영어 단어장을 들었다. 도서관에 가더라도 종합자료실이 아니라 열람실로 행하는 나날들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해야 하는 것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책, 특히 소설과 멀어졌다.


뭐지? 우린 그때 이별한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내 옆에 이렇게 있게 되었지?

생각해 보면 '돈'이었다. 재물에 대한 나의 그득그득한 욕망이 내 옆에 다시 책을 가져다 놓았다.

재테크에 관심이 생겼을 때, 내가 선택한 다양한 방법 중 하나는 재테크 필독서를 읽는 것이었다.

아니, 옆에 두는 것이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재무제표를 보는 법과 워렌 버핏의 어록은 나에게 맞지 않았지만, 나의 재물욕은 끝이 없었고 e-book서재에는 책이, 아니 나의 욕망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리고 내 삶이 살랑살랑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출근길에 숨이 편안히 쉬어지지 않았고,

사무실에서 심장이 조여 오는 날들이 많아졌다.

처음 겪어보는 스트레스의 신체화 증상에 나는 허겁지겁 책을 찾았다.

재테크로 채워졌던 e-book 서재가 마음을 챙기는 법, 명상을 하는 법, 나랑 비슷한 힘듦을 겪은 사람들의 에세이, 뇌과학 책으로 채워졌다. 이번엔 모으기만 하지 않고 책을 읽어나갔다.

그렇게 우리의 로맨스는 다시 시작되었다


엄청난 다독가도, 책벌레도 아니지만

책이 늘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서점 산책을 즐기며, 여행을 가면 해당 지역 독립서점에 들르는 일도 잊지 않는다.

친구들이나 작가에게 책을 추천받으면 메모장에 적어놓는 습관이 있고

그 책 리스트를 백로그처럼 뽑아 다음 읽을 책을 고르는 일이 즐겁다.

우아! 나 책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읽은 책의 추천받은 구절을

이를 테면「싯다르타」의

"저는 기다리고, 생각하고, 단식정진할 수 있습니다"를

주문처럼 외면서 잠시 싯다르타인 척하는 것도 즐겁고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서로 같거나 다른 감상을 찾아보는 것도 즐겁다.

그리고 영상/오디오보다는 블로그 글을 검색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고민과 삶, 그 노력과 치열한 시간들이 나에게 너무나 쉬운 방식으로 전달되는 이 메커니즘도 너무 감사하다. 내가 글을 알고 쓸 수 있음으로써 얻게 되는 이 수많은 것들이 과분하고 놀랍다.


어쩌면, 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안 되겠다, 지금 당장 독서모임을 찾으러 인터넷 세상을 서핑하러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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