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데, 왜 다 초록색인데?
위기다.
나는 몇 번째 3평 남짓되는 내 방을 뱅글뱅글 돌고 있다.
어쩌면 시리즈 4화 만에 위기가 찾아왔다.
좋아하는 것이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아! 어쩌면 이제부터 진짜 「어쩌면」시리즈의 시작이 찾아온 듯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뭘까?
벽 한쪽에 늘어져 붙여진 엽서들을 살펴본다. 엽서?
그리고 책상에 키보드의 매력에 빠져 구매한 나의 소중한 적축 기계식 키보드를 만져본다.
키보드? 하, 그렇지만 키보드 덕후들만큼 좋아한다고 마음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어?
이게 바로 '일단 해봐' 인간의 최후일까..
나는 4화를 업로드하지 못하고 방구석에 숨어 어쩌면 「어쩌면」시리즈의 최후를 지켜보게 될까?
벌-떡
다시 일어난 나는 이번엔 거실로 나가 뱅글뱅글 돌아본다.
"그만해, 정신사나와"
이런 나를 계속 쳐다보던 엄마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랑곳 않고 집 안 이쪽저쪽을 두어 바퀴 더 돈 이후 내 방에 돌아와 앉는다.
그러고 보니 집 안 전체 분위기랑 내 방의 분위기가 여실히 다르다.
'분명 내 방 모든 곳에 내 취향이 덕지덕지 붙어있긴 한데 말이야'
연두색 벽지, 호수 옆의 거대한 버드나무 사진, 초록색 셔츠를 맞춰 입은 나와 연인의 그림,
계란프라이 꽃이 잔뜩 찍힌 거대한 포스터, 뭐야?
어쩌면, 나 초록색 덕후일지도?
지금 보니 나는 꽤나 열렬한 우드 + 그린톤 러버다.
원래 사람 마음이 인테리어에 꽂히기 시작하면 톤을 맞추는 게 기본이긴 하지만,
인테리어 소품이 아닌 자잘한 소품들도 초록색 투성이다.
딥그린 연필꽂이, 풀색 책꽂이, 이끼모양 컵받침, 아니 노트북 파우치도?
잠깐, 지금 내가 깔고 앉은 방석 뭔데, 왜 초록색인데??
우드톤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진짜 이 풀색을 좋아하는 거 아냐?
그래, 한 가지 색에 파묻혀 살아야 한다면, 나는 단연코 녹색이다
생각해 보면 그 취향은 굉장히 날카롭기까지 한데
채도가 높은 쨍한 녹색이나 쨍한 연두는 안된다.
특히 청테이프 초록은 절대 No!
봄에 막 싹을 틔운 싱그러운 연두색도 좋아하지만
빨강 다홍 주황 귤색 노랑 노랑연두 연두 풀색!
20 색상환 중 제일은 역시 풀색이다
이처럼 내 취향은 녹색에 있다.
나는 왜 하필 초록이었을까?
왜 나는 내 방을 숲 속처럼 꾸미지 않고는 못 배겼던 걸까?
기억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수원 화성 근처에 살았다.
아빠가 쉬는 일요일이면, 옆집 이웃들과 우리 가족은 돗자리를 들고 방화수류정에 나들이를 나가곤 했다.
그러면 나는 닥터슬럼프의 주인공을 따라 팔 벌려 정신없이 뛰었고, 내 귓속에는 함께 놀러 나간 언니 오빠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폭신한 잔디는 넘어져도 걱정이 없었지만,
넘어질 때마다 내 베이지 바지 무릎에는 초록색 풀물이 들었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내 엉덩이와 무릎의 흙을 털며
풀물이 들어서 어떡하냐며 속상해하셨지만
나는 주말 나들이의 기억이 옷에 담긴 듯
신기하게 내 무릎에 든 풀물을 바라보곤 했다.
초록에 대한 기억은 온통 행복하고 평화로운 기억뿐이다.
친구들과 오르던 제주의 오름,
생에 처음 내려본 찐 녹차의 초록빛 색,
유럽 거리에서 사람들이 사가던 크리스마스트리,
한강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호들갑스럽게 잔디를 횡단하던 기억
내가 자꾸 내 방을 녹색으로 물들이려는 이유는
무릎에 물든 풀물처럼 행복한 기억을 방 안에 가득 담아 오려는 마음일까?
이 취향으로 어떤 삶을 만들어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초록덕후들을 위한 쇼핑몰을 열어볼까? 초록 가득한 홈페이지에
따스하고 푸르른 초록 굿즈가 가득한 초록이들을 위한 세상!
그렇게 나는 초록 컵을 초록 컵받침에 올리며
초록 파우치에 노트북을 넣고, 초록 개구리 슬리퍼를 신고 와식생활을 하러 간다.
아, 그때 그 초록 침구도 살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