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있을 수 있는데 왜?
젊은 시절의 아빠는 한국사를 무척 좋아해서, 우리의 가족 여행은 현장체험학습을 방불케 하며
오랜 이야기가 담긴 다양한 장소를 직접 방문해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나고 자란 곳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고 싶었던 아빠의 노력이 무색하게
대부분의 장소와 이야기들은 나를 그저 스쳐 지나갔지만
때때로 강하게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아빠, 부처님도 누워계신데?!"
까불거리는 나에게 '와불'에 대한 그림은 점잖게 말하는 아빠를 놀릴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로 여겨졌다.
"그렇네? 부처님도 누워있는 걸 좋아하시나 보다."
"어! 나돈데!!"
아빠가 하는 멋진 말들을 다 반박하고 싶었던 장난스러운 나의 마음은
부드러운 아빠의 대응에 부처님과 공통점 찾기로 방향을 틀었다.
이때 형성된 부처님과의 라포는 지금도 마음이 복잡할 때면 나를 암자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빈둥이들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세요
여긴 침대입니다. 제가 틈만 나면 누워 있는 곳이죠.
어쩌면, 제가 좋아하는 것은 와식 생활일지 모릅니다.
제 재능은 침대에 있을지도?
이 넘치는 재능을 어디에 써야 할지
누워있는 걸 정말 좋아한다. 누워있을 수 있는데 왜 앉아있죠?
세상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정말 잘 때 빼고는 아예 침대에서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나 다수라고 한다.
처음 MBTI가 유행했을 때, 나의 MBTI는 ISFP였다. MBTI에 빠삭한 사람은 앞의 말에서 바로 맞추셨을지도 모른다. 해당 MBTI에 대해 관련 글들을 찾아보면, ISFP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눕지 못하는 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라던가, 누울 수 있어 보이기만 하면 일단 등을 대본다거나 하는 다양한 유머글들이 많다.
심금을 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일 MBTI의 유명인이 유재석 님이셔서, 이런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나의 성향을 크게 변호받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아니 나는 어쩌면 와식 생활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부지런한 사람이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그 길로 바로 손 발을 씻고 입고 있던 옷을 빨래바구니에 던져 넣는다.
그러고 나면 방에 들어가서 잠옷을 가져와 변기 커버에 올려놓고 바로 샤워를 시작한다.
단 한 번도 이 과정을 주저한 적이 없는데, 이 모든 행동의 이유는 빨리 침대에 눕기 위함이다.
성스러운 침대에 외부의 먼지를 가져올 수 없으니까 누구보다 빠르게 샤워를 한다.
뿐만 아니다, 나는 밥을 먹으면 바로 설거지를 하는 유니콘 같은 사람이다.
밥을 먹자마자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올려놓고 물을 부어놓고, 반찬 그릇을 냉장고에 넣은 후 식탁을 훔친다. 그리고 설거지를 하고 그 길로 바로 양치까지 하고 나면? 이제 누울 수 있는 준비 완료이다.
누워있다가 설거지 때문에 다시 침대 밖을 나와야 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한 철저한 준비 과정이다.
물론, 역류성 식도염이라는 불상사는 막을 수 없게 되지만 나는 눕지 않는 대신에 왼쪽으로 눕는다는 차선책을 택한다. 왼쪽으로 누우면 위의 모양에 따라 역류성 식도염에 대한 위험이 조금 낮아진다고 한다.
먹고 바로 누우면 소라지만, 나는 가장 행복한 소가 되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침구를 고르는 것도 누구보다 신중하다.
여러 시도 끝에 나의 취향은 두 가지로 수렴하게 되었다.
찬바람이 느껴지는 겨울에는 역시 보들보들 극세사 이불만 한 것이 없다.
다른 이불의 느낌을 좋아하다가도 찬 바람을 맞고 만나는 극세사는 정말 극락이 따로 없어서, 얼굴부터 발끝까지 이불 안으로 파고들게 되고 만다.
그리고 역시 그 외 계절에는 바스락거리는 고밀도 원단이 최고다. 호텔 침구에서 만난 그 첫 느낌은 이불과 침대와 내가 물아일체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느낌을 준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모든 몸의 피부부터 귀까지 꽂히는 바스락바스락 거리는 소리는 늦장부릴 수 있는 주말에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다. 때로 쇼핑몰의 농간에 아쉽게 바스락 거리는 소리의 침구를 샀을 때에는 그 소리가 바스락↗이 아니라 묘하게 바스락↘이 되는데 친구가 노래방에서 아이유의 좋은 날의 삼단고음을 2단까지만 부르고 포기했을 때의 그 아쉬운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침구의 구매 리뷰를 누구보다 꼼꼼히 살피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매일 살아가다 보면 침구를 새로 샀을 때의 그 기분은 어디로 가고, 내가 산 침구가 극세사인지 고밀도 호텔침구인지 알게 뭐람, 비몽사몽 찾아온 아침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주말이면 샤워를 깨끗이 한 상태에서 다시 이불의 감촉을 일부러 하나하나 느끼며 침대로 들어가는 시간을 갖곤 한다. 행복은 침대에 있으니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침대 위에 앉아있다. 언제 어디서나 누울 수 있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나에게 침대 위에서 쓸 수 있는 앉은뱅이책상은 필수품이다. 언젠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마마무 솔라와 같은 와식생활을 꿈꿔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무리 슬라이딩 침대 책상을 발품 팔아도 지금 내 방의 인테리어와 어울리는 책상을 찾지 못해 포기했다. 아무리 마음의 눈을 열고 보아도 자꾸 병원 입원실의 책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모습 때문에, 차마 결제를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마징가 Z와 같은 앉은뱅이책상을 구했는데, 높이도 조절이 가능하고 기울여서 책도 올려 볼 수 있는 접이식 책상이다. 이 책상을 침대 옆에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영화를 보곤 한다. 이런 나를 보고 아빠는 항상 말한다.
"오늘도 하루 종일 침대에서 안 나왔지 너!"
"응!"
내가 찾은 첫 번째 나의 선호는 누워있는 것.
즉, 와식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