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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제주 여름 나기

by 은도

제주에 여름이 왔다. 청초한 수국을 피워내는 6월 초부터 태양의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6월의 하늘은 유난히도 푸르고 깨끗했다. 햇빛에 노출되면 금세 정수리가 뜨거워지고, 곧바로 온몸이 데워졌다. 그래도 그늘에 있으면 산뜻한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영롱하게 반짝이는 햇살을 올려다보며 청량한 초여름을 즐기곤 했다.


[011] 수국.jpg 제주 청수리


점점 달아오르는 열기를 식혀주는 장마가 찾아왔다. 육지에 있을 땐 장마가 싫었다. 출근하는 날 비가 오면 출근하는 날이라서 싫었고, 쉬는 날 비가 오면 쉬는 날이라서 싫었다. 하지만 이번 장마는 달랐다. 나는 시원하게 비가 오는 날을 기다렸다. 숲속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비가 싫었던 게 아니라 비를 느낄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나 보다.


짧은 장마가 물러가고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었다. 작열하는 태양은 마치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듯한 지옥불 같았다. 높은 습도에 땀이 삐질삐질 났다. 모기는 왜 그렇게 많은지,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모기에게 한두 방쯤 물리는 건 예삿일이었다. 숲과 바다가 흔한 곳이기에 모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예상 못한 또 다른 불청객이 있었으니, 바로 바퀴벌레였다. 제주의 바퀴벌레는 육지의 그것들보다 더 크고 움직임도 둔하다. 얼마나 둔한지 느릿느릿 내 앞을 가로질러 가면 외려 내가 그들을 피해 가야 할 정도였다.


뜨거운 태양과 후텁한 공기, 온갖 벌레들까지, 집 밖을 나서기가 무서워졌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나는 점차 실내로 숨어들었다. 하루종일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나가더라도 에어컨이 빵빵한 도서관이나 카페만 찾아다녔다. 쾌적하고 시원했지만 뭔가 아쉬웠다.


[011] 구름.jpg 제주 외도동


그렇게 좋아하던 바다 냄새도, 숲의 공기도 점차 희미해지던 어느 날 밤이었다. 내 방 창가에 예쁜 초승달이 떴다. 갑자기 바다 위에 떠 있는 달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승달에 홀린 듯 바다를 향해 걸었다. 제주의 여름밤은 낮과 달리 제법 선선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덕에 한낮의 열기는 머무르지 않고 흩어졌다. 높은 습도에 땀이 나다가도 바람이 불면 땀이 식으며 잠시 시원해지기도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걸을 만했다. 그날, 나는 바닷가에 앉아 바다 위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여름밤의 낭만을 느꼈다. 그 후로 밤이 되면 나는 가끔 집 밖을 나섰다. 밤바다에 발을 담그며 열기를 식히기도 하고, 산책을 하며 풀벌레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래도 낮에는 여전히 실내에 머물렀다. 그것도 되도록 집과 가까운 곳에, 제주의 도심에.


[011] 초승달 바다.jpg 제주 도두일동


그러다 며칠 전, 가보고 싶었던 카페를 찾아 간만에 조금 멀리 다녀왔다. 목적지가 위치한 곳은 구좌읍 종달리였다. 차를 타고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좁은 골목길에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정자가 있었고, 그 정자에는 할머니 일고여덟 분 정도가 모여 있었다. 밭일할 때 쓸 법한, 뒷덜미까지 해를 가리는 모자를 하나씩 쓰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가 오후 2시 정도였으니 매우 덥고 습할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선풍기도 하나 없이 묵묵히 앉아 오후 한 때를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서 더위를 받아들이는 여유와 자연스럽게 여름을 나는 초연함이 느껴졌다. 할머니들에게는 별것 아닌 일상이었겠지만 내게는 한여름의 낭만으로 다가왔다. 나는 더위와 여름을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느라 이 계절의 낭만을 잃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벌써 여름이 끝나간다. 이미 입추가 지났고, 시간은 8월 중순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나는 아직 여름 바다에 풍덩 뛰어드는 시원함을 느끼지도 못했고, 계곡물에 발 담그고 빨간 수박을 베어 물 때의 달달함을 느껴보지도 못했다. 이제 와 보니, 그깟 더위가 뭐라고, 벌레가 뭐라고 이 한 계절에만 즐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포기했을까 싶다.


아직 나에게는 몇 주의 여름이 남았다. 남은 여름의 끝을 붙잡고 이제라도 작열하는 햇빛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겠다. 더우면 더운 대로, 땀이 나면 나는 대로, 견뎌보는 거다. 한낮에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아닌 후텁한 자연의 바람을 느끼며 모여 있던 종달리 할머니들처럼, 나도 그냥 여름을 받아들이고 여름을 살아보아야겠다.


[011] 여름 숲.jpg 제주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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