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우리는 길을 떠났다.
무조건 남서 방향으로 계속 간다. 가다가 생이 끝난다 해도….
산을 타고 계속 걷다 보니 산속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먹고 버린 플라스틱 물병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들은 그 병을 짐 속에 계속 주워 담았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줍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병을 모아 팔겠다고 줍고 있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플라스틱 페트병이 아주 귀한 대접을 받는다. 기찻길이나 강에서 페트병을 하나 주우면 아이들이 서로 가지겠다고 싸운다. 그 병을 팔면 돈이 되고 술병, 기름병으로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에게
“그걸 줍지 말아라. 여기는 너무 많아 버리는 쓰레기다. 하루 종일 주우면 한 자동차가 될 텐데 그걸 주워 어찌하려느냐?”
그렇게 설득해서 아들은 더 이상 페트병을 줍지 않게 되었다.
길로는 한 번 나서지 못하고 그렇게 산길로만 며칠을 걸었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비닐 방막을 뒤집어쓰고도 추울까 싶어 아들을 꼭 안고 재웠지만, 하루 13시간씩 길도 없는 산에서 오직 방향에 의지해 가다 보니 아들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나흘째 되는 날 아들이 너무 힘이 드니 저 아래에 나 있는 길을 따라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고 나도 그러자 하고 함께 길 위로 나섰다.
두 시간쯤 길을 따라 걸었을까? 갑자기 뒤에서 무장을 한 군인 일곱 명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곤 무작정 때리더니 우리 손에 수갑을 채웠다.
그렇게 어떻게 손 써볼 새도 없이 중국 변방대(국경수비대)에 잡혔다.
하늘이 무너진다. 고생 고생하며 국경을 벗어나 나흘 동안 걸어 <안도현(安圖县) 대마록구(大馬鹿沟)>라는 곳까지 왔는데, 여기 와서 잡히다니….
우리는 변방대 군인들 차에 태워져 지난 나흘 동안 고생해 걸어왔던 그 길을 단 세 시간 만에 되돌아가 국경 초소인 ‘백산 초소’로 압송되었다. 백산 국경 초소에 도착하니 거기에는 무슨 일인지 끌려와 조사를 받는 중국인들도 있었다.
우리는 몸수색을 받았고 모든 것을 뺏겼다. 그중 주머니에 있던 면도칼을 찾아 가리키며 무슨 칼이냐고 묻길래, 수염을 깎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자, 대수롭지 않게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이었다. 우리 북한 사람들이 숫돌에 갈아서 사용하는 면도칼이어서 중국인들은 그 용처를 짐작하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 사람이 나간 후 나는 쓰레기통에서 그 칼을 주워 다시 호주머니에 보관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 군인이 오더니 수갑을 찬 우리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 앞에 서자 안에서 들려오는 조사관의 말소리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북한과 통화하는 말소리였다.
“오늘 아침에 두 명 보냈는데, 또 두 명이 잡혀 왔어. 조사 좀 하고 내일 보낼게.”
그 순간 이젠 죽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의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이 되었다.
그 땅에 끌려가 그놈들 손에 죽느니 내 손으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나는 수갑을 찬 상태에서 주머니 속의 면도칼을 꺼내 들고 오른손으로 나의 왼손 손목을 그었다. 순간 피가 분수처럼 뿌려졌다. 죽어야 한다는 그 한 가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오른쪽에 서 있던 아들이 이 모습을 목격하고는
“아버지, 나도….”
하며 자기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 땅에 끌려가 짐승처럼 죽을 바에야 이 자리에서 같이 죽자.”
생각하고 아들의 수갑 찬 손을 당겨 오른손을 그었다. 마주하고 있는 아들의 손목에서 뿌려지는 피가 내 얼굴에 튀면서 앞쪽의 옷을 적셨다.
그다음부터는 내게서 나가는 피는 보이지 않았다. 아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그런 피였다. 자식의 몸에서 나오는 피가 그렇게도 진한 줄 몰랐다.
“분명히 손목을 그었는데 나는 왜 아직 정신이 멀쩡하지?”
아직 내가 죽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시 면도칼로 들어 목의 동맥을 끊으려 했다. 그 순간을 본 군인들은 비상이 걸렸고 나에게 달려들어 쥐고 있던 면도칼을 쳐버려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군인들이 무리로 달려들어 한 사람에 여섯 명씩 붙어서 통째로 안아 들고 응급으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군인들의 몸에도 피범벅이었다.
병원으로 이송 도중 아들은 정신을 잃었고 나는 아직도 내가 죽지 않은 것이 기가 막혀 수갑을 찬 상태로 스스로 내 목을 계속 졸랐다.
그러자 이젠 수갑을 양손에 채워 침대 양옆 기둥에 묶었고, 꼼짝하지 못하도록 군인들이 내 몸을 잡고 있었다.
그 사이 의사들은 아들의 손목을 지혈시키고 벌어진 상처를 열 바늘 넘게 꿰매놓았다. 다음으로 내게로 와서 치료하려 할 때 나는 “제발 여기에서 죽여 달라”며 간절히 호소하며 강력하게 치료를 거부하였다.
거기에 모인 군인들, 의사, 간호사, 경찰 할 것 없이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왜 우리가 간절히 목숨을 끊으려 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어렴풋이 아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의 소동이 멈추고 잠시 후 한 장교가 들어오더니 한국말을 내게 건네 왔다.
“너희를 풀어주겠으니 죽으려 하지 마라.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북한 땅으로 다시 돌아가라. 이 중국 땅이 얼마나 넓은지 아느냐? 어디가 되었든 너희는 다시 잡힐 것이다. 너희들이 나가서 다시 잡히면 우리가 곤란해진다.”
그 사람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를 범죄자로 잡았는데 사사로운 감정으로 풀어준 것이 알려지면 자기들 직업이 무사하지 못하지 않는가?
나는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풀어준 후 다시 잡히더라도 여기서 잡혔다 놓아주었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겠다. 나는 약속을 무덤까지 가져가 지키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자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내 수갑을 풀어주었다.
그때가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밖에는 잠잠하던 하늘이 몸부림치며 울 듯 대나무 줄기 같은 비가 내린다.
나는 붕대를 감은 팔을 들고 아들에게 다가가 눈물을 흘리며
“철아, 철아!”
하고 아들의 얼굴을 만지며 불러보았다. 그래도 아들은 병원에서 주사를 놔줬는지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내가 울면서 부르니 눈을 간신히 뜬다. 나는 아들의 얼굴을 만지며
“철아, 이 사람들이 우리를 풀어준대. 우리 또 가자. 아버지 하고.”
하며 통곡하자, 아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참 아들을 부둥켜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소리에 감동한 하늘의 눈물인지 세찬 빗줄기가 뿌려지고 있었다.
비가 그렇게 오는 중에도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섰고, 병원 사람들은 종이상자에 빵 5개, 붕대, 진통제 10알, 술 한 병을 넣어 우리에게 주었다.
한참을 기다려 어디서 왔는지 민간인이 자동차를 가지고 병원 앞에 왔다. 그 자동차에 타라고 한다. 그 차에는 우리 두 명과 장교 한 명, 운전기사, 이렇게 네 명이 탔고, 뒤에는 군인들이 탄 자동차가 따라붙었다.
밤 열두 시쯤 되었을까, 변방대 초소를 두 개 지나 굽은 도로에 차가 멈추었다. 우리에게 ‘내리라’고 하더니 ‘가라’고 했다. 멈춰 선 차 안에서 차에서 내린 우리를 그냥 지켜보고 있더니 우리가 비를 맞으며 그 자리에 계속 그냥 서 있자 얼마 후 차를 돌려 가버렸다.
나는 그 사람들이 그들의 통제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우리를 넘겨 놓고, 바로 다시 붙잡아 북한으로 보내려고 하는 속셈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가라고 하는 앞쪽에서 다른 변방대가 우리를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 너무 생동하게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가라는 길로 가면 다시 잡힐 것 같아 오던 길로 조금 거슬러 걷다가 바로 산 쪽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