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면 빨리 갈 순 있겠지만 통행증 단속이 심한 것이 문제다. 자동차 트럭을 이용해서 가는 방법도 있겠으나 도중에 너무 많은 단속초소를 통과해야 한다.
고민 끝에 나는 공구를 등에 지고 아들과 함께 오늘은 이 마을, 내일은 저 마을에서 신발, 그릇, 자전거를 고쳐주고 돈을 벌면서 가기로 했다. 또 재워주는 집에서는 아픈 사람 침 치료도 해주며 국경을 향해 매일 조금씩 나아갔다.
도중에 안전원의 단속에 걸릴 때는 공구를 보여주며 장사 간다고 하니 별로 의심받지 않았다. 몸은 좀 힘들었지만, 아들을 배불리 먹이고 때론 장마당에서 먹을 것도 사 먹으며 그럭저럭 국경 인근에 도착했다.
집 떠난 후 18일 정도 걸렸다.
나는 중국 땅이 보이는 산에 올라 아들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철아. 아버지는 이 땅이 너무 싫고 희망이 없어 떠나려고 한다. 아버지는 이 땅에 청춘을 바쳐 충성했지만, 나중에 너의 미래도 지킬 수 없는 그런 곳에 너를 놔두고 갈 수 없어 여기까지 너를 데리고 왔다.”
라며 말문을 뗐다.
어릴 때부터 <원수님 고맙습니다>만 배워온 아들은 깜짝 놀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네가 나쁘다고 배운 남조선으로 가려고 한다.”
아들은 내 대답에 더욱 놀란 눈으로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더니 결국 자기는 못 간다고 했다. 태어나서부터 충성 교양에 세뇌된 결과였다.
“그래. 아버지는 네 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너도 이제 성인이니 네 앞길은 네 생각에 맡길 생각이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와 헤어지면 앞으로 영원히 못 볼 텐데 괜찮겠니? 그래. 네가 다시 집으로 가겠다고 하면 여기 돈, 식량 다 줄게. 가지고 가라. 그러니 이제부터 네가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봐. 생각할 시간을 30분 줄게.”
이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 30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아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견뎌왔던 10년의 세월이 그 자리에서 다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아들도 얼마나 생각이 많았겠는가? 태어나서 그 땅이 제일 좋은 줄 알고 살았고,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분이 장군님이라고 세뇌가 된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철천지원수라고 배웠던 남조선으로 간다고 하니….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10년처럼 느껴졌던 30분은 다 흘렀고, 나는 다시 아들을 설득해 보았다. 그러나 아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있다. 침묵의 시간이 또 흘러갔다.
나는 할 수 없이
“아버지는 영 가니 너의 운명은 네가 결정해라.”
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기 시작했다. 떠나가는 걸음걸음에 천근만근을 달아놓았는지 발걸음이 무겁다.
어디까지 갔을지, 이젠 아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것 같아 뒤돌아보니, 그제야
“아버지!”
하며 소리 내어 울면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들을 가슴에 안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가자. 가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미래가 없는 이 땅을 한시라도 벗어나자!”
그렇게 한참을 아들과 부둥켜안고 울고 나서, 가지고 왔던 수리 공구 가방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다시 걸어 압록강 강변에 도착했다.
5월이라 봄이라지만 아직 백두산 아랫동네는 이제야 새파란 싹들이 올라오고 있어 몸을 숨길 장소로는 신통하지 못했다. 겨우 움푹 꺼진 웅덩이에 몸을 숨기고 중국 쪽을 바라보니 강폭은 그리 넓지 않으나 강물이 거셌다. 우리 쪽에는 철조망이 없지만 중국 쪽에는 철조망이 있다. 5월의 압록강은 백두산 쪽에서 내려온 얼음덩어리들이 가끔 떠내려갔다.
국경 순찰을 하는 군인들이 다섯 명씩 무리 지어 다니고 있는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려면 3~4시간 더 있어야 했다. 그렇게 어둑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늘에서 선물이 쏟아져 내린다. 갑자기 대나무 줄기 같은 비가 쏟아져 내리니 군인들이 비를 피해 모두 도망을 갔다.
이때다 싶어 바로 강으로 뛰어들었다. 아들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손목을 밧줄로 묶은 채였다.
중국 쪽에 거의 다 도달했을 때인데 가슴까지 차오르는 거센 물살에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다.
물살에 떠밀려가기 시작하는 순간 온 정신은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20m쯤 더 떠내려가면 철조망에 닿게 될 터이지만 방법이 없었다. 속절없이 손목이 함께 묶인 아들과 물살에 떠내려가던 중 아들이 나무뿌리 하나를 잡았다.
중국 쪽 강기슭에 자란 나무인데 땅이 물에 쓸려가면서 물가에 노출된 나무뿌리였다. 그 나무뿌리를 잡은 덕분에 물살은 우리를 철조망이 아닌 강기슭으로 붙여놓았다.
땅에 올라 겨우 몸을 숨기던 순간 마침 내리던 비는 그쳤고 북한 쪽의 군인들이 CCTV를 보고 무리로 우리를 향해 달려 나왔다.
“야! 이제 방금 여기로 사람이 넘어갔어!”
하면서 달려와 공중에다 총을 몇 방 쏘았다.
우리가 10초만 늦었으면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허탕을 친 군인들이 북한 쪽으로 되돌아간 후 우리는 서둘러 산 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오르다 너무 숨이 차서 숨을 좀 돌리려 멈추어 서서 본 우리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얼음물에서 나와 속옷까지 물에 젖어 몸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였고, 추위 때문에 입술이 떨리고 몸이 굳어 잘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겨우겨우 서로를 부축하여 좀 멀리까지 산을 타고 가다가 움푹 꺼진 웅덩이에 불을 피우고 밤을 보냈다. 조용히 타오르는 불을 보니 내가 겪어왔던 지난날이 머릿속으로 영화처럼 지나갔다.
김일성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중국으로 갔었다지만 나는 나라를 빼앗긴 것도 아닌데 남의 나라 땅으로 도망을 왔다는 생각을 하니 더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날 압록강을 건너오면서 일제 강점기에 김일성이 불렀다는 노래를 마음속으로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일천구백십이 년 삼월 이 일은
이 내 몸이 압록강을 건너는 날일세.
년년이 이날은 돌아오지만
이 내 목적을 이루고서야 돌아오리라”
이 노래는 원래 1912년 김일성이 태어나던 해, 독립운동가들이 일본군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가면서 불렀던 노래라 한다. 이 노래를 몇십 년 후 김일성이 다시 부르며 압록강을 건넜다고 했다.
그런데 몇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세습의 폭정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또다시 이 강을 건너가고 있지 않은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고향을 잊지 못해 평생 그리움에 산다고 한다. 이 땅에 사는 이산가족 그 누구든 부모, 형제, 자식과 함께 살았던 고향을 떠나고 싶어 떠났겠는가? 그것도 목숨을 걸고서 말이다.
바다에 사는 연어들은 자기가 태어났던 곳으로 목숨을 다해 찾아와 후대를 남긴다고 한다. 거북 역시 자기가 죽는 줄 알면서도 태어난 곳으로 다시 찾아와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그런데 왜 북한 사람들은 자기 고향을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느냐고 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탈북한 숱한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는 사막, 이름도 모르는 감옥, 이름도 모르는 강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 그들이 바랐던 소망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탈출 중 붙잡혀 지옥 같은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 처형된 그 모든 영혼에 평온한 안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