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빗줄기에 온몸이 젖었고 거기다 피까지 흘린 몸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속을 손 더듬이로 한발 한발 옮겨 드디어 산 위에 올라왔다.
나는 이 상태로 더는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나무 밑에 앉아 가져온 빵을 하나씩 먹고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배가 따듯해지면서 기운이 돌았다. 오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손목의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흘러내려 감았던 붕대는 피범벅이다.
날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자 우리는 나머지 빵들을 다 먹고 진통제도 먹고 붕대를 다시 감고 또다시 깊은 산을 타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산길.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숲 속에서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아직도 백두고원 쪽 땅 밑에는 얼음이 깔려있었고,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품고 가야 했다.
풀뿌리를 캐 먹고 나물을 뜯어먹으며 사흘을 산속으로 들어가다 보니 산 위에 세워진 통신탑이 보였고 그 아래에 통신소가 있어 들어갔다. 거기에는 남자 한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중국말이 통하지 않으니 몸짓을 하면서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했다. 그 사람은 남은 밥을 내놓으며 먹고 가라고 한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먹으면 또 잡힐 우려가 있다고 생각해, 내놓은 밥을 주머니에 담아 나와 거기서 벗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멀리에서 지켜보니 경찰차가 올라온다.
그렇게 열흘 동안 산길을 걸어 중국 요녕성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는 곳까지 왔다. 그동안 산길에서 곰도 만났고, 또다시 잡힐 위험을 수없이 넘기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이젠 더는 걸을 힘도 없었다. 신발 바닥은 다 닳아 구멍이 났고, 옷도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져 그야말로 원시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얼굴에는 수염이 한발 길어져 있고 치료받지 못한 상처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했다. 붕대도 다 떨어져 마지막으로 감은 붕대 위로 고름이 올라온다. 아들은 밤이면 상처에 통증이 와 앓는 소리를 냈고 나 역시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속을 헤매며 걷다가 숲 속에서 닭을 기르는 양계장을 발견했다. 나는 더는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양계장을 찾아갔다. 양계장 옆에는 천막으로 만들어진 부엌이 있었고 그 옆에는 아래로 개울물이 흐르는 작은 집 하나가 보였다.
부엌 안에 들어가니 아침에 해놓은 밥이 많았고 빵, 고기반찬 등 먹을 것이 가득하였다. 주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며칠 굶은 아들이 음식에 손을 덥석 가져다 댔다. 나는 그 순간 소리를 질렀다.
“그만 내려놔! 철아. 아버지도 먹고 싶어. 그러나 주인이 없는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은 도둑질이야.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그때까지 우리 굶어 안 죽는다. ”
아들의 손이 잡으려 해던 음식에서 멀어졌다.
나는 살면서 남 부끄러운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것을 아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는 부엌 밖에서 서로를 기대고 앉아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멀리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곧 큰 개 한 마리가 우리를 향해 짖으며 달려왔고 뒤에는 중년 남성이 어깨에 큰 자루를 메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더니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 각자 붕대 감은 팔을 목에다 걸고 몸에서는 썩은 내가 풀풀 나는 데다가 당장이라도 죽을 것같이 야윈 두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곧 우리에게 다가와 중국말로 뭐라 뭐라 말했다. 하지만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나는 손짓, 발짓을 하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우리에게 음식상을 푸짐하게 차려주었다.
배를 채우고 나니 몸에 기운이 돌았다. 그다음엔 가위를 달라고 해 수염을 깎아 버리고 돌처럼 굳은 붕대를 잘라냈다. 아들의 손목에서는 꿰맨 바늘자리에서 고름이 나왔고 내 손목은 상처가 개구리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썩은 냄새가 나는 고름이 흥건하다.
그것을 본 주인은 어딘가로 전화했고 잠시 후 한 여자가 붕대와 약을 가지고 왔다. 덕분에 우선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더 이상 무리해서 길을 가게 되면 아들을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오면서도 기진맥진한 아들이
“아버지, 나는 좀 푹 자고 싶어.”
라고 말하며 정신을 놓으려 했던 것이 기억났다.
사람이 며칠 굶고 죽을 때가 오면 우선 잠이 오고, 그런 사람이 잠자면 죽는다고 알고 있었기에 나는 세차게 아들의 빰을 때려 정신을 잃지 말라 하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들을 업고 개울을 건너왔기 때문이다.
나는 주인에게 다시 손시늉을 해가며 내가 돈을 받지 않고 여기서 일을 해줄 테니 아들 상처가 나을 때까지 좀 신세를 지자고 했다. 그러자 그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때는 5월 말, 6월 초로 ‘참고비’와 같은 산나물이 많이 나는 계절이어서 주인은 매일 산에 다니며 나물을 뜯어서 말려 팔고 있었다.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아들은 집에 있으라 하고, 나는 주인과 함께 매일 두 자루씩 두 번 산에 가서 나물을 뜯어주었다. 나는 왼손을 다쳤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나물을 뜯어 왼손으로 건네 쥔 후 자루에 담는 방식으로나마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물을 긷고, 산에 갔다 와서는 닭장 청소를 하고 닭 모이도 주고 하다 보니 보름이 지났다.
이젠 나물 채취 시기도 지났기에 집에서 아들과 함께 머물던 어느 날, 멀리서 고급 승용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언제든지 도망갈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차에서 한 중년 남성이 내리더니 우리를 보며 한국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어찌나 반가운지…. 아들 외의 다른 사람으로부터 한국말을 들어본 건 거의 한 달 만이었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묻더니 우리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조선족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원이면서 중국 공안(경찰)에서 20년 동안 간부로 근무한 후 퇴직한 사람이라 했다.
처음에는 양계장 주인에게 부탁받고 자신이 운영하는 연길 시내 영업장에서 일을 시키려고 했는데, 직접 와보니 아무래도 두 사람 다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었기에 그냥 한국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