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나서 그는 우리에게 다시 찾아와 자기가 한국행 브로커를 알아봤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우리는 양계장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헤어져 그 사람 차를 타고 연길로 향했다.
가는 곳마다 공안의 검열초소가 있었지만, 그가 창문을 내려 얼굴을 보여주자 옛날 상관을 알아본 공안들은 우리 차를 그냥 통과시켰다.
우리는 연길시 어느 농촌 마을에 젊은 부부가 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조선족인 그 사람은 연길에서 좀 인맥이 넓은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 사연을 다 들은 그는 한국으로 연결되는 브로커와 통화를 하였고 우리의 긴박한 사연을 들은 브로커는 빨리 움직이자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대체로 탈북을 하려는 자가 7~8명이 모이면 출발한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옮겨져 기나긴 여정을 거쳐 드디어 중국 남부 ‘쿤밍(곤명, 昆明)’이라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브로커 비용은 한 사람당 한국 돈 400만 원인데, 돈이 없는 우리는 거기서 브로커 비용을 한국에 가서 갚겠다고 약속하고 해당 내용이 적힌 문서에 사진을 붙이고 손도장을 찍었다.
쿤밍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할 때는 밤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험난한 산악지대를 트럭을 타고 가다가 내려 밀림이 가시덤불이 있는 진창길을 헤쳐야 했다. 도중에 중국과 라오스의 공안 단속과 검문을 피하지 못하면 거기까지 와서 북송될 수도 있기에 매 순간이 피 말리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관문인 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메콩강을 건너야 한다. 단속을 피해서 칠흑 같은 한밤중에 작은 배에 몸을 실었고 악어가 득시글하다는 메콩강을 건넜다.
탈북은 성공이었다.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탈북,
자유를 찾아 1만 km. 목숨을 걸어봤고 목숨을 던져도 보았던 그 어려운 길.
하늘을 바라보며 간절히 빌어 보았던 탈북.
아들의 몸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며 절망의 벼랑 끝까지 달려보았던 눈물이
지금은 누가 보아도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열심히 살고 있다.
언제나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부를 때면 가슴속에 그 무언가가 차오르며 뭉클해진다.
나는 이젠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리고 3만 5천여 명의 탈북민들을 그 넓은 자유의 품에 안아준 대한민국에 항상 감사한다.
우리는 작은 통일이다.
언제나 열심히 살아 우리를 돌봐주고 받아준 대한민국에 보답하고
언젠가 다가올 큰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