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원하던 먼 미래는 결국 오늘이 된다
괴로움은 인간의 권리다.
나는 당당히 괴로워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나의 괴로움은 수치심과 닮아있었다. 느끼지 말아야 할걸 느껴버린 것처럼. 들키지 말아야 할걸 들켜버린 것처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충실히 괴로워했다.
괴로움에 푹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수치심에서 벗어나려고 또 발버둥 쳤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른 길이 없다는 걸 안다. 내가 가려는 길이 맞다는 것도. 내가 괴로운 걸 괴롭다고 말하는 게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도.
나는 진작에 좀 더 당당해졌어야 했다. 내 주변 누구도 아직 나에게 당당해지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나는 이제 스스로에게 말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나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세상에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투로 말하는 이가 사실은 더 큰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어쩌면 불쌍한 것이다. 그에게도 당당해지라고 말해주는 이가 없었을 테니.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비슷해서 만났고 이제는 달라져서 헤어지는 것뿐이라고.
결혼생활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삶 전체에 퍼졌던 온기는 아무런 꽃도 피우지 못하고 눅눅한 곰팡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 거죽을 한 커플만 벗기면 그 안에는 여전히 소중한 씨앗이 있었다. 누구도 그 씨앗을 나에게서 뺏어갈 수는 없다. 그건 온전한 내 것이었다.
전남편이 이 글을 읽는 다면 아마도 내 씨앗을 우리의 아이라고 오해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나의 씨앗이 있고 아이는 아이의 씨앗이 있다. 아이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러니 내 씨앗이 될 수도 없다. 이 당연할 걸 그에게 계속 변명하듯 설명해야 했다. 그는 아이가 자신의 씨앗이 될지 엄마의 씨앗이 될지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그저 사랑이다. 내 모든 걸 거름으로 내어주어도 아깝지 싶은 사랑. 그러나 그런 슬픈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기로 하자.
나는 씨앗을 품고 지키고만 있었지만 아이에게는 씨앗을 잘 발화시켜 뿌리내리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내 씨앗을 잘 뿌리내려서 보여주어야 했다. 내 씨앗을 잘 뿌리 내어 아이에게 보여주는 게 먼저다. 아이를 키우니 그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울창한 숲을 이룰 거다.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나는 묵은 옷장을 모두 정리했다. 언젠가는 입고 예쁘게 사진을 찍을 줄 알았던 웨딩드레스부터 버렸다. 인터넷에서 산 짧은 미니 웨딩드레스였다. 원피스라고 보기에는 많이 화려하고 반짝이는 드레스는 버리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반짝임을 간직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버리려다가 옷장 한편에 고이 보관하던 드레스였다. 결혼을 준비하며 스냅사진 패키지 대신 선택한 3만 원짜리 드레스를 10년이 지나고서야 마침내 버릴 수 있었다.
난 뭘 위해서 그렇게 참고 기다렸을까.
'언젠가는' '나중에는' '마침내'를 기대하며 참 많이도 참았다. 그러다 아이를 키우면서 깨달았다. 오늘 내가 내 행복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기대하는 먼 미래는 오지 않는다. 그 먼 미래도 결국 오늘이 될 테니까.
오늘을 위해서 살기로 했다.
오늘 할 수 없는걸 내일 할 거라고 기대하며 집안에 놔두지 말아야지. 그리고 집에는 행복한 추억이 깃든 것만 두자. 묵은 짐을 다 갖다 버리니 신기하게 몸이 가벼워졌다. 그렇게 비워낸 자리에는 책이 한 권씩 꽂혔다.
마침내 삶을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