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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사피엔스의 역설 (1편)
내 안에 살고 있는 독

by 푸른 소금

15년 전, 한 환자가 의사 앞에서 당당히 외쳤다.

“비염. 비염 이라뇨, 아닙니다.”

“비염이 뭐죠, 에이! 제가 무슨 그런 지저분한 병이 있겠어요.”

콧물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나오고, 재채기로 인해 머리가 울릴 정도였음에도.

환자는 감기 증상이라고 우겼다.

그 환자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당시에는 비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저 지저분한 병이라는 편견만 가지고 있었다.

전문가인 의사의 말도 우격다짐으로 부정한, 부끄러운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을 했었다.



1. 호모사피엔스라는 이름의 아이러니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로운 인간’이란 뜻이다. 약 30만 년 전에 지구상에 존재했다.

인류의 조상 중 네안데르탈인은 사라졌고, 현생인류는 호모사피엔스만을 일컫는다.

이들은 다른 인류와 차별화된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협력을 통해 소통을 하고 집단지성을 통한 학습능력이었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생존방식 등 지식을 상호 전수하였다.

그리고, 타인의 경험을 존중하고 학습하며, 소통을 통해 세대를 거쳐 축적된 지혜로 문명을 건설하였다.

그게 바로 우리다.


2. 호모사피엔스의 역설

그런데 21세기 호모사피엔스는 묘한 역설에 빠져 있다.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여,

무한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능력은 점점 점점 더 퇴화돼 가고 있다.

30만 년 전 종족의 생존을 보장해 온 ‘듣고 배우는 능력’즉 핵심역량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탓이다.


3. 모두 다 똑똑하다는 시대 – 퇴화하는 소통의 본능

오늘날 우리는 손끝 하나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얻고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검색창에 글자 몇 개만 치면 굳이 거추장스럽게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된다. 무료에 가까운 데이터 사용료만으로도 궁금증을 해소

할 수 있다. 요즘은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모두는 정보에 아주 밝은 호모사피엔스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한다.

많이 아는 것과 똑똑한 것은 엄연히 차별이 있다.

정보의 축적이 지혜의 성장을 의미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고도로 진화한 인간이 원시적으로 퇴행을

하게 되는 어쩌면‘디지털 네안데르탈인’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4. 인지적 오만 – 호모사피엔스의 질병

“검색하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인데 굳이 당신의 말이 필요 없어요.” 의사 앞에서 우격다짐을 했던 나.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우스운 꼴을 보였지 않은가. 현대의 호모사피엔스는 이런 착각에 자주 빠진다.

경험 많은 선배 앞이나, 지혜로운 후배 앞에서도 스마트폰 정보가 경험과 전문성을 능가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단, 몇 분 만에 찾은 정보를 평생의 경험인 양 오류를 범하는가 하면,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진 타인의

지혜를 하찮게 여기기도 한다.

‘확증편향’‘인지적 오만’ 진화 심리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을 보이고 있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런

오류를 통해 호모사피엔스 만이 갖는 독특한 질병을 가지고 있다.

“잘난 척 하기는... 나도 그 정도는 알아”라는 착각들이 인간 문명의 핵심 동력인 화합과 소통의 창구를 막아 버렸고, 급기야 호모사피엔스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집단지성’이 개개인의 아집에 의해 퇴화돼 가고 있다.

진정한 소통은 말하기보다 듣기에서 시작된다.

내가 아는 것에 대한 신념이나 맹신보다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겸손함이 필요하다. 이것이야 말로 정보

과잉시대 호모사피에스가 택해야 할 새로운 진화 방향이다.

15년 전의 나처럼 “이건 감기 증상이다. 비염 같은 그런 병이 아닐 것이다.”라며 우매하게 버티는 대신

“그러면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요?”라고 자문을 구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무지에 늦게 눈을 떠서 15년째 비염은 내 안에 살고 있다.


5. 디지털 시대의 현명한 인간

현대인들은 ‘자기 안에 살고 있는 독한 놈’ 즉 경청을 거부하는 아집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이 녀석이 얼마나 많은 지혜와 소통을 앗아갔고 진화의 가능성을 차단했는지 성찰해야 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진정한 호모사피엔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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