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안에 자라는 병

자기부정과 가족부정으로 키우는 치매

by 푸른 소금


엄마의 자기부정

엄마는 “요즘 내가 기억이 깜박하는 게 노망이 걸린 거 같다”라는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그 말씀 속에는 ‘설마 아니겠지’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엄마가 노망이라니요. 나도 금방 까먹는데 걱정 마세요. 나이 먹으면 깜박해요.”라며 안심시켜 드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나 자신을 안심시키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알고 계셨다.

치매가 서서히 다가온다는 것을. 당신 안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셨다. 고통과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시며, 가끔씩 당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쥐 박으시셨다.

마치 사라져 가는 엄마 자신을 불러오려는 듯. 흩어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듯. “에이고, 내가 이제는 쓸데가 없다는”는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아픔.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할 공포를 혼자 안고 계셨을까.

강한 자기부정이었다. 엄마는 치매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느끼고 계셨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제대로 말씀하지 못하셨다.

지금도 엄마는 당신이 치매에 걸린 줄 모르고 계신다.
아니, 어쩌면 알고 계시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엄마는 왜 부정할 수밖에 없었을까.

1. 뇌가 자신의 손상을 인식하지 못함 – 신경학적 증상

치매가 진행되면서 사고, 판단, 조정, 결정, 계획을 담당하는 전두엽과 공간인식과 방향 감각을 담당하는 두정엽이 손상된다. 그러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인지기능저하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고집도 아니다. 뇌손상으로 인한 신경학적 증상이다.

치매환자는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엄마는 진심으로 ‘나는 괜찮다’고 믿으신다.

그것이 더 슬프다.


2. 너무나 두려워서 - 심리적 방어기제

치매 초기에는 엄마처럼 자신의 변화를 어렴풋이 알아차리는 순간들이 있다.

“내가 뭘 하려고 했지?”... 물건을 둔 자리가 생각나지 않거나, 사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을 때... 그 순간마다 엄마는 느끼셨을 것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기에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까? 엄마는 어쩌면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방패가 부정이었다.


3.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봐 - 사회적 이목에 대한 두려움

엄마 세대에서 치매는 단순한 병이 아니다. 엄마께서 오랜 세월 동안 목격한 치매는 무능, 의존, 부담을 의미한다. ‘이제는 쓸모가 없는’,‘자식이나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 ‘죽음에 가까워진...’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셨던 엄마.

누구보다 강하고 현명하셨던 엄마.

그런 엄마에게 치매환자라는 꼬리표는 당신의 존재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사회적 편견과 낙인이 두려워 증상을 숨기고 부정한다.


4.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 과거의 자아상과 현재의 괴리

엄마의 생각 속에는 아직도 과거의 자신이 남아있다. 아침마다 주간보호센터에 등원 전 화장을 하듯 거울을 보시는 것을 CCTV로 자주 본 적이 있다. 그러시다가 소파에 몸을 파묻고, 멍하니 쳐다보는 것을 보면 현실과 과거 속 두 모습 사이의 간극이 엄마를 괴롭힌다.

엄마의 부정은 약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끝까지 자신을 지키려는 강함으로 나타난 것이다.

무너져 가는 자신을 지키려는 필사의 몸부림이었다.

누구에게도 표현하시지도 못하고, 가족들은 몰랐다.

치매는 발병과 동시에 진행이 시작되는 병이다. 진행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매 시간마다 진행은 된다.

‘내일이면 오늘 보다 더 기억이 사라 질 것이다. ’


가족의 부정 – 보고 싶지 않았던 진실


나 역시 부정했다.

고향으로 발령을 받고 나서 거의 주말마다 엄마를 찾아뵌 지가 벌써 15년쯤 된다. 매주 월요일이 되면 이번 주에는 어떤 음식을 준비할까?라는 고민을 할 때마다 너무나 행복하다. 재래시장이며 마트에서 구입할 물품을 구분하여 구입을 하고, 엄마와 식사를 한다.

엄마에게 치매는 어울리지 않는 질병이라고 생각했다.

그 배경에는 세상을 누구보다도 강하고 당신의 의지되로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설마 우리 엄마가?’‘아니야 그럴 일 없어.’


무지에서 비롯된 잔인함

부정의 가장 큰 원인은 무지였다. 치매라는 질병에 대한 기초상식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엄마의 단순 감정이나 투정으로만 여기고 감정을 둔감하게 받아들였다.

엄마와 식사를 마치고 시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죄책감에 쌓여서 괴로운 마음이다.

엄마의 말을 자르고, 말문을 막아 버리고, 가끔씩 화난 어투로 소리를 지르고, 너무나도 큰 불효를 저질렀다.

그럴 때마다 자식에 대한 실망감과 좌절감이 가득한 엄마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죄책감과 함께 가슴이 터질 거 같은 마음 차라리 ‘멀리 살아서 엄마를 어쩌다 뵙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해 본 적도 있다.

‘가까이 있는 자식이 불효를 저지른다.’ 나만의 뼈아픈 공식이다.


나는 엄마의 치매를 왜 인정하지 못했을까.

1. 무지와 오해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지”

나는 치매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이 들면 깜빡하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물건을 어디 뒀는지 못 찾으시는 것을 건망증이라고 넘겼다. 치매를 인식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노화로 착각했다.

장독을 훔쳐 가는 것을 핀잔을 주어서 엄마의 생각을 부정했다.

나는 보지 못했고, 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무지는 잔인하다.


2. 심리적인 충격 “우리 엄마는 아니야”

‘엄마에게 치매는 어울리지 않아’,‘설마, 아닐 거야’

엄마는 강한 분이셨다. 우리 가족에게는 든든한 기둥이셨다.

그런 엄마가 약해진다는 것, 무너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치매라는 질병보다는 엄마를 돌봐야 하는 두려움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3. 죄책감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엄마가 치매 진단을 받던 날 가장 먼, 든 생각은 내 탓이었다.

“내가 더 일찍 알아챘어야 했는데”“내가 내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내가 나쁜 자식이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거 같다.


4. 희망적 사고 “조금만 있으면 좋아지실 거야”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지실 거냐’, ‘일시적인 증상일 거야’,‘약 드시면 좋아지실 거야’ 나는 습관적으로 희망에 매달렸다.

희망은 때로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된다.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다. 그사이 엄마의 병은 조용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기간 동안 반복되는 이 고통.

익숙할 만도 한데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엄마가 치매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부터 마음이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인정은 포기와 체념이 아니었다.

남은 시간을 더 소중하게 보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서 치매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 결과 뇌 과학 관련 국가공인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뇌파를 공부했고, 지금은 치매 위험성이 있는 분을 대상으로 뇌파를 측정해서 치매를 조기에 예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