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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 명이 다름인가, 틀림인가?

나만의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는 우리에게

by 푸른 소금

언제부터 '다름'이 '틀림'이 되었나?


어느 날, 후배 2명과 저녁식사 자리가 있었다. 직장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갑질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막내 후배가 “나는 형님의 생각이 틀리 다고 생각해요.?라는 말에

젊잖게 듣고 있던 후배가 발끈했다. “야 이 사람아! 뭐가 틀려? 내 말이 잘못이라는 거야?”

막내 후배가 무심코 던진 이 한마디에, 갑자기 전쟁터가 될 뻔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민감해졌을까?

일상에서도 틀림이라는 말을 우리는 습관적으로 쓰고 있다.

“여기 커피숍 아이스 아메리카노 맛이 앞집 커피숍이랑 맛이 틀린 거 같아”주인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 의견은 너랑 틀려”, “서울과 인천은 문화가 달라”,“여성은 남성과 틀려”...

언제부터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걸까?


다름과 틀림 그 결정적 차이

다름. ‘너와 나는 다르다.’- 중립적인 사실
틀림. ‘너는 틀렸다.’- 옮고 그름의 판단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다르다’는 ‘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를 의미하고, ‘틀리다’는 ‘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를 의미한다.

빨간 사과와 파란 사과는 다른 것이 되는 것이고, 빨간 사과와 참외는 틀린 것이 되는 것이다.

“시험 문제를 틀렸어”처럼 정답이 있거나, 사실과 다른 경우,“일정이 틀렸네”처럼 예상이나 계획이 어긋난 경우를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즉, ‘다르다’는 어떤 사실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틀리다’는 그에 대한 평가가 반영되어 있다. ‘다름’이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받아들임의 개념이라면 ‘틀림’은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논리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을 혼동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틀렸어’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


왜 우리는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내가 곧 기준

우리는 자신의 경험, 가치관, 생각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틀렸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남편과 아내의 아이들 육아 문제에 대해. 남편은 아이들의 자율성을 우선 시 여기는 반면, 아내는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요구하는 방식이라면 누가 틀린 사람이 되는 것인가?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 내 방식이 절대적이지도, 유일한 방식도 아니다.


다름이 주는 불안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불안해진다. 내가 틀린 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상대를 ‘틀렸다’고 규정해야, 내가 자동적으로 나는 ‘옳다’가 되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그래서 나의 확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다름을 부정하게 된다. 사람들은 말하기 편하고 듣기에도 익숙해서, 일상 대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르다’는 의미로 ‘틀리다.’로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문화, 다른 세대, 다른 직업,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게 된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이 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져 왔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성공과 실패, 회색지대는 없다.

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은 회색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절대적으로 틀린 것도 드물다. 대부분은 관점의 차이, 상황의 차이, 가치관의 차이일 뿐이다.


공감 능력의 부족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능력이 부족하다. 내 눈으로 세상을 보니, 다른 시각이 보이지 않는다. 육아 맘은 워킹맘을 이해하지 못한다. 청년은 노인을, 노인은 청년을 이해하지 못한다. 각자의 입장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소통의 단절

후배 이야기처럼 “너는 틀렸어”라고 말하는 순간 대화는 끝난다. 상대방은 방어적이 되거나, 공격적이 되거나, 침묵한다. 그래서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동료끼리,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명절 때 정치이야기 금지, SNS에서 친구 차단, 회사에서 파벌 형성... 모두가 소통과 관계의 불통으로 치닫고 있다. 다름을 포용하지 않는 인식은 우리 사회의 다문화 가정이나 장애인,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나타나며, 불통의 정치로 이어져 결국 사회가 양극화로 가는 길을 초래한다.


창의성의 억압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창의성이 자랄 수 없다. 다른 생각, 다른 방식, 다른 시도가 모두 틀린 것으로 치부되면,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의 심리는 다양성이 있다는 심리유형을 제시했다. 이 이론이 기초가 되어 MBTI가 탄생하였고, 성격유형을 16개로 구분하였다. 16개의 틀린 성격이 아니라, 인간 심리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취지다.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창의성은 확장될 것이다.


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법


1. 내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나는 이렇게 생각해, 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야”

이 한마디를 마음에 새기자, 내가 옳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틀린 것은 아니다.


2. 왜?라고 물어보기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해”, “어떤 경험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려고 노력하자, 상대의 다름 뒤에는 그 사람만의 이유와 맥락이 있다.


3. 나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기

공감의 시작은 역지사지다. 상대의 입장에서 나를 대입해 보자.

-직장맘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는 마음.

-프리랜서가 불안정한 수입 속에서 자유를 선택하는 이유.

-채식주의자가 고기를 거부하는 신념.

나와 다르지만, 이해할 수 있다.


4. 그럴 수도 있겠다. 인정하기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그런 생각도 있을 수 있구나 정도만 인정하면 된다.

나는 다르게 생각하지만, 네 생각도 충분히 이해해 이 한마디가 관계를 살린다.


5. 언어 바꾸기

“너는 틀렸어”→ “우리는 생각이 다르네”

“그건 잘못됐어”→ “나는 다르게 생각해”

“왜 그래”→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

작은 언어의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든다.

언제부터 '다름'이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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