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인류가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발달한 사회적 발명품이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집단으로 사냥을 하고,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협력하면서 언어가 생겨났다. 언어를 통해 인간은 지능이 발달한 진화과정을 거쳤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 놀라는 발명품에 특별한 의미를 담았다. 바로 ‘말(언어)’, ‘말(동물)’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같은 글자로 표현한 지혜이다. 외국인들이 가장 헷갈려하는 이 두 글자에는 선조들의 깊은 통찰이 있는 것이 아닐지?
1. 빠르다.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속도
동물 중에서도 가장 빠른 동물은 단연 치타다. 하지만, 오래 달리지는 못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적토마’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했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나왔을지 짐작이 간다. 이처럼 말은 빠르면서도 오래 달리는 유일한 동물이다.
언어는 입을 여는 순간, 뒤 돌아보지 않고 마치 격발 된 총구를 떠난 총알처럼 오로지 직진한다. 요즘은 SNS를 타고 단 몇 초 만에 지구촌 어디라도 배송된다.
2. 통제하기 어렵다. : 고삐를 놓치는 순간의 위험
말은 성질이 예민하고, 등치에 비해 겁이 많아서 놀라면 주인도 걷어 차고, 뛰쳐나간다. 기수가 고삐를 당기지 않으면 낭떠러지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아주 고약 스런 녀석이다. 언어는 이성을 잃으면 그리스 신화 속 트로이의 전쟁과, 영국과 스페인 간 ‘젠킨스의 귀 전쟁’... 총보다 더 위험한 무기가 되어 우리의 삶을 한 순간에 파멸로 이끈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설사 주워 담더라도 오랜 기간의 피해복구기간을 거쳐야 한다.
3. 온도가 있다. : 삶을 얼리거나 녹이는 힘
말의 체온은 37.5에서 38.5다. 아무리 추운 혹독한 날씨에도 스스로를 지키며 생존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부드럽고 따뜻한 말은 빙하보다 단단한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말 한마디로 천량빛을 갚는 다’는 속담이 있듯이 말은 온도에 따라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4. 운반기능. : 정신과 세상의 이야기를 전하는 매개체
말이 물건과 사람을 나르듯, 언어는 그 사람의 정신과 철학, 세상의 이야기, 언어의 온도를 싣고 운반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곧 그 사람의 영혼이 담긴 그릇이다. 그래서 말에는 그 사람의
온기, 품격, 삶의 결이 스며있다. 말을 할 때는 신중하게 상대를 배려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익명성과 비대면 문화의 확산이다. 온라인이라는 사이버 공간 속에서 익명이라는 방패뒤에 숨는 비열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상대방의 감정과 배려는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독설로 ‘용광로 같은’ 말을 쏟아 낸다. 직접 얼굴을 보지 않으니,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니면 말고’식으로 무책임하고, 패륜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타인들에게 고통을 안긴다.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와 경쟁 심화. ‘빨리빨리’와 ‘경쟁사회’가 부추기는 문화가 문제다. 효율과 성과를
중요시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상대방을 깎아 내리고 비난하는 ‘뜨거운 말’들이 너무 많다. “너 때문에 이번 계획이 망가졌어”,“꼴도 보기 싫어”,“도대체 능력이 뭐야”.
동료를 자신의 감정쓰레기통쯤으로 여기는 몰 지각한 사람들이 있다. 동료를 동지가 아니라 오로지 적으로
규정짓고 막가파식으로 무지하게 밀어붙이는 게 문제다. 극단적인 상황의 사회 현상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
처럼 “나도 당했으니, 돌려준다”는 삐뚤어진 보상심리가 만연해 있다.
감정의 피로와 무관심의 만연. 구직, 승진, 창업, 육아... 바쁜 일상과 심리적 스트레스 속에서,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데, 남의 감정에 공감할 여유가 없어요”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씨끄러”, “관심 없어”, “그러 던가 말던가”, “니 맘대로 해”라는 무관심의 ‘차가운 말’이 우리 사회를 더욱 경직시키고 있다. 이 차가운 말은 오히려 뜨거운 말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빙하기 보다 더 꽁꽁 얼려 영원히 해동되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반응과 자극 추구. 검증되지 않은 내용들이 온라인상을 활개를 치고 있다. 숏폼처럼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노출이 되다 보니, 자극적인 콘텐츠에 익숙해진 현대인 들이다. 그러다 보니 감정을 여과 없이
즉각적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뇌 과학적으로 보면 도파민 중독에 해당한다. 더 높은 수위를 갈망하는 좀비의 근성이랄까. 이러한 행동들이 통제력을 잃고 말의 고삐를 쉽게 놓치게 만든다.
몽골에서 걷기보다 먼저 말을 타듯, 우리도 평생 언어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리고 어떤 온도로 말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다.
말을 타는 것과 말을 하는 것
말을 타려면 배워야 한다. 말의 성질을 알아야 하고, 고삐를 당기는 힘, 몸의 균형, 말에게 보내는 신호,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모든 게 연습이 필요하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말하는 방법을 평생 배워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온도로 말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절제와 통제하는 요령을 습득해야 한다.
•감정이라는 고삐 : 순간의 격앙된 감정을 멈추게 하는 힘
•이성이라는 고삐 : 상황과 맥락에 맞게 말을 조절하는 힘
•배려라는 고삐 :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힘
•온조 조절이라는 고삐 : 말의 온도를 적당히 조절하는 힘
고삐가 풀린 말은 관계를 크게 다치게 한다. 말을 못 타는 사람들이 , ‘말꼬리를 잡고, 말문을 막고, 말을 뒤집는’ 행동을 하듯이 미숙한 언어 사용은 결국 자신은 물론 소속된 공동체 사회의 파국을 맞게 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말의 온도는 바로 인간의 체온과 같은 36.5도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힘들지”, “니 맘 알아”, “잘할 수 있어”아픔과 슬픔을 감싸 안는 치유의 힘을 가진다.
하지만, 36.5를 넘으면 열이나 관계를 태우고, 낮으면 저체온증에 걸려 관계를 얼려 버린다.
그 품격은 인격이 되고, 인격이야 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를 증명한다.
내 말이 뜨거운 용광로였는지, 차가운 빙하였는지, 아니면 온기를 나누는 36.5도의 말이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현명한 고삐로 말의 온도를 조절하고, 따뜻한 품격 있는 언어로 우리의 삶과 관계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질주시키는 지혜로 룬 마부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