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말이 우선인 사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온 50대 후배.
그런 후배에게, 다른 후배들의‘내부민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선배가 요령만 피우고, 성과를 가로 챈다.’
‘마치 좋은 사람처럼 인기 관리만 한다.’라는 불만이었다.
나 또한 이미 알고 있었고,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시기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회적으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대한 답변이,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그 뒤로 몇 번 이야기를 했지만,
오히려 역정을 낸다.
후배는 상급자인 나의 말에도 불만이 가득했다. 아니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신 말은 듣지 않을 거야”라며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가 버렸다.
“선택적 청취”
예상했던 상황이다.
우리는 어떤 말을 더 선호할까?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나, 명확한 지적,
그리고 냉정한 현실. 우리는 이것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진실보다 기분 좋은 말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왜일까?
이유는 꽤 단순하다.
남에게는 논리로 접근하고, 나에게는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이중잣대’때문이다.
사람들은 평소 논리적인 것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특히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거나, 무언가 불편함을 느낄 때는 더욱 그렇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근거가 뭡니까.”
상대에게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거나,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근거를 댈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면 확연히 달라진다.
누군가 나에게.
논리적으로 따질 때,
명확한 근거를 요구할 때,
문제점을 지적할 때를 생각해 보면,
갑자기 불편해지면서,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다.
남에게는 논리를 요구하면서, 나에게는 감정을 우선 시 여기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모순이다.
진실이 불편한 이유는 명확하다.
나를 부정하고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태도, 관계 맺어온 방법.
진실은 이 모든 것을 흔든다.
그래서 강한 저항감을 갖는 것이다.
변화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단순하게 강아지가 성견이 되는 과정이 아니다.
‘줄탁동시’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내부 열망과 외부적 환경이
끊임없이 조율되고 연결되는 것이다.
자신의 여지껏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방식을 수용한다는 것은 고행길처럼 힘든 인내를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불편한 진실보다, 안락한 위로를 원한다.
위로는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편하다.
하지만, 여기에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채지 못할뿐더러,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후배는 얕은 관계에서는 좋은 사람처럼 보였고,
신뢰감 있는 관계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진실을 포기해야 할까?
사람들이 싫어하고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 진실이 아니라 지적질이다.
진실은 사실이고, 지적질은 감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우선적으로 인지를 한다.
자신의 태도를 점검하기보다는 후배처럼‘기분 나빠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기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
일종의‘자기 회피본능’이다.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성’에 갇히게 된다.
이런 문제들은 마일리지처럼 차곡차곡 쌓일 뿐만 아니라,
더불어 비판과 토론이 사라지고, 신뢰와 함께 사람들은 떠나간다.
결국 문제는 성숙함이다.
성숙한 사람들은 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의 피드백을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변화의 절실함을 몸소 느낀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알면서도 그렇게 성숙하지 못하다.
나 역시 다를 바 없다.
나도 지적질이 싫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적인 불편함이다.
성장하려면 불편해야 하고,
변화하려면 고통스러운 게 당연한 과정이다.
또한 발전을 위해서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후배에게 진실을 말했을 때, 그가 역정을 낸 것은 예상된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다.
진실은 불편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도 말해야 하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보는 질문.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사람인가?
들어야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인가?
그 선택이 내일과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