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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이야기

by 김영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날을 기리는 성(聖) 금요일(Good Friday) 저녁이다. 예수가 죽은 후 그에 대한 기록으로 첫 번째 책이라고 알려지는 마가복음은 모두 1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 마가복음 1장 1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장 14-15>


그리고 이렇게 끝이 난다.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마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아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여라." 하였다.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하였다.– 마가복음 16장 6 – 8> ***(마가복음은 16장 45절로 끝이 난다만, 대다수의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은 본래 마가의 기록은 16절에서 끝이 나고 이 뒷부분은 후대의 첨가로 여겨진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예수 이야기가 시작된 첫 장소가 갈릴리였고, 이야기를 맺는 장소 역시 갈릴리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물 위를 걷고, 거친 풍랑을 잠재우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숱한 기적과 치유의 역사를 만들어 냈던 곳이 바로 갈릴리였다고 기록자 마가는 전하고 있다.


마가는 16장의 기록 가운데 1/3이 넘는 분량에 예수의 마지막 한 주간의 삶을 담고 있다. 마가복음 11장은 예수가 자신의 마지막 삶의 여정 한 주간을 시작하는 종려주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갈릴리 출신 시골사람 예수가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모인 도시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그에게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호산나!’ 곧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는 외침이었다. 예수가 곧 군중에 의해 신이 되려는 시간이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예수의 행적과 말씀들에 대한 기록을 이어가던 마가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이르는 첫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예수를 죽일 음모—–과월절 이틀 전 곧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몰래 예수를 잡아 죽일까 하고 궁리하였다.>


예수 죽음의 시작은 곧 누군가의 음모로 시작되었다는 기록이다. ‘그 누군가’는 곧 당시 체제의 기득권자들이었다. 이어지는 마가의 기록에는 예수를 배신한 제자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예수를 부인한 제자, 예수를 떠나는 제자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나아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으려 했던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며 악을 써 외치는 모습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한 예수를 기리는 성 금요일 밤이다.


죽음을 맞기 전 예수는 이런 기도를 했다고 마가는 전한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조금 앞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하시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그렇게 예수는 군중이 아닌 스스로의 뜻도 아닌 신(아버지)에 뜻에 따라 죽음을 맞는다.


신의 뜻이라고 했지만 얼핏 보면 아주 헛된 것이었다.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을 피하려던 그의 기도를 그가 아버지라 부르던 신이 끝내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 밤부터 시작하여 예수는 절대 고독을 맛보다 끝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그가 겪었던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뭇 신자들, 환호하던 군중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던 아버지 곧 신이 아니었을까?


죽기 직전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밥상을 함께 하면서 그가 삼 년 동안 갈릴리 호수가를 떠돌며 이야기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가 14: 22)” 이때가 유월절이라고 하였다. 죽기 직전에 마지막 식탁, 그는 나누는 밥상을 온몸으로 보여 설명하였다. 기쁨과 나누어 먹는 밥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마침내 말로 써가 아니라 그의 온몸을 던진 증언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다가서는 것이다. 더불어 나누어 먹는 본을 보이며 마침내 그의 몸을 나누는 밥으로 내어 놓은 역사적인 장면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그리고 다시 갈릴리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마가 16장 6-7절)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번역된 ‘에게이로’라는 본래의 말 뜻은 <일어나다> 또는 <궐기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캄캄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일어난, 다시 궐기한 예수는 갈릴리로 그의 삶의 현장이었던 갈릴리로 먼저 향했다. 기쁨은 바로 이것이다. “기쁜 소식” 곧 복음 – 예수가 살아 복음이 되어 오늘 여기 우리들의 갈릴리에서 기쁨으로 일한다는 성서의 증언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시 갈릴리다.– 그 땅에서 예수는 나병환자를 고치고,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고, 귀신 들린 자의 정신을 바르게 하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혈루증 걸린 여인을 치유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예수는 병 고침을 받은 이들을 향해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명령했다고 마가는 이야기한다.


이런 예수의 명령을 <가족(사회)에게로 돌아가라는 귀환명령>이라고 규정한 사람은 일본 신학자 아라이 사사구(荒井献, 그의 책 ‘예수의 행태’에서)이다.


예수 당시 병든 자들은 죄인이요, 소외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죄가 있어 죄인 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외로운 처지를 원하지 않았다. 죄 없는 죄인이요, 원치 않은 소외였기에 한 맺힌 이들이었다. 예수의 귀환명령은 바로 한 맺힌 이들에게 한을 풀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이었다.


예수의 명령에 따라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서는 귀환 이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 전해지는 당시의 관습이나 체제로 미루어 귀환 이후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곤고하였을 것이다. 가족과 이웃들은 여전히 그들을 비정상적이었던 사람으로 취급하였음에 틀림없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가족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지만, 여인이 돌아간 곳에는 여전히 손에 돌멩이를 들고 아무 때나 그들이 맘만 먹으면 던질 수 있는 이들이 넘쳐 났을 것이다.


바로 부활한 예수가 먼저 가 있겠다고 한 곳, 갈릴리의 모습이다. 그리고 2025년 오늘, 예수가 먼저 와 있는 곳, 내가 발 딛고 사는 여기의 모습이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




예수 부활 후 ……. 사람들은 ‘그가 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을까?’라는 물음 대신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뜻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매달려 산다. 신앙의 이름으로.


그의 수염은 오늘도 길고 거룩하다. 그는 여전히 밥이다. 나누어지지 않는….

어쩌면 끝나지 않을 그의 이야기가 오늘도 이어지는 까닭일 게다.


하여 나는 오늘도 ‘밥이 된 예수’ 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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