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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변하는 것들에 대한 기쁨

by 김영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물이나 일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들을 할 수 있음으로 사람이다. 바로 관점(觀點, a point of view)의 차이다.

말하던 예수와 그를 듣던 이천 년 전 갈릴리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갖고 있었던 핵심적 차이로 첫째 ‘밥’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했다. 두 번째 관점의 차이는 ‘기쁨’이다.

이따금 읊조리곤 하는 시(詩)가 있다.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그걸 바라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Point Of View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이제 몇 군데 성서를 찾아 읽어 보자.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 이하 공동번역 성서)>,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아흔아홉 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누가 15: 7)>,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누가 15: 9-10)>,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누가 15: 32)>


긴 이야기를 다 인용하지 못한다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하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나는 “기쁨”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기쁨”이란 것이 죽어 저 세상에 가서 누리는 것이거나 막연하게 생각 속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전과 지금의 바뀐 상황에서 누리는 기쁨이라는 말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 잃었던 것을 되찾은 현실, 집 나가갔던 아들의 돌아옴같이 이전과는 다른 어떤 현실 속에서 맛보는 기쁨이다.


예수는 이 천년 전 갈릴리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다. 나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곳이요’라는 설명이 필요 없는 공동의 사전 이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오기를 고대하였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차이 때문에 예수는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바로 이 기쁨에 대한 이해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따랐던 추종자들이나 예수와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어찌 보면 좀 황당한 이야기였다.


먼저 예수를 따랐던 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이들의 입장에서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이사야 9: 5-6)>


이 염원은 갈리리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온 유대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표상이다. 그들의 기대는 분명 로마 압제에서의 해방, 로마의 앞잡이 노릇하던 예루살렘 성전체제와 헤롯 왕국의 변혁이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다윗 왕권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대신한 구세주가 통치하는 세상을 바랐던 것이다. 그들이 누리는 기쁨이란 바로 그런 나라에서 사는 것이었고 예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를 적대시했던 이들의 눈에도 예수는 분명코 무슨 일을 내고야 말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마태 11: 19> 바로 먹고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어울려 다니는 무리들이 문제였다. 먹고 마시되 체제 안에 사람들과 하는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무리와 어울려 먹고 마시고 나누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분명 체제 전복을 노리는 세력 바로 중심이었다.


예수가 말한 상황이 바뀐 곳에서 맛보는 기쁨에 대한 이해는 듣는 이들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섰다. 추종자들에게는 확 바뀐 현실이 곧 다가올 것이고 그 중심에 예수가 있고 기쁨은 그들의 몫이 된다는 것이었으며, 적대자들에게는 체제 전복의 언어로 다가선 것이다. 그러다 이들의 이해는 한 곳에서 만난다. 추종자들은 어느새 실망하고 분노한 군중으로 변하고, 적대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예수의 죽음이다. 무엇이었을까? “기쁨”을 말하였던 예수가 왜 “기쁨”을 고대하였던 당시의 사람들의 함성과 손에 죽게 되었을까?


나는 ‘확 바뀌는 세상’과 ‘꾸준히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바뀌는 세상’의 차이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의 첫 선포는 매우 다급하고 급박한 표현으로 선언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바로 지금 눈앞에 다가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상은 확 바뀌는 혁명적 세상이 아니다. 바로 이 차이다. 사람들은 당장 맛보아야 할 기쁨, 확 바뀌는 세상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나라를 말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마가복음 4장 30-32에는 이른바 ‘겨자씨의 비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4장 26-29절에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가 마태복음 13장 33절에는 ‘누룩의 비유’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늘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 :33)’는 말을 세상을 확 바뀌는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만 겨자씨의 비유나 자라나는 씨의 비유처럼 나는 서서히 변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 본질 밀가루가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 이야기들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할 일과 하나님의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모른다(마가 4: 26-27)’ 사람이 할 일은 씨를 뿌리는 일이다.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가는 과정이란 말이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핵심적 이해는 바로 이것이다. 땅에 씨를 뿌리는 것, 가루에 누룩을 섞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할 일이다. 그리고 씨를 심는 땅, 누룩을 받는 가루는 역사이며 현실이다.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자라고 부풀리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 바뀌는 어떤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만질 수는 없어도 역사 안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 나라는 이 천년 전 예수가 서서 말하였던 갈릴리에서부터 오늘 여기까지 지속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곳이며 이 일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초청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를 죽음으로 이끌어 간 (아니 어쩌면 그 스스로 이끌려 간) 당시 사람들의 하나님 나라의 이해는 지금 오늘도 곳곳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그를 또다시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자꾸 뒤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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