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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검승부

칼로 물을 베다

by 손영화

잃을 것이 많은 자는

잃을 것 없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소시오패스에겐

강한 자가 되어야 산다.


미국계 회사에서 일하던 당시, 현지채용된 미국 MBA는 야심가였다. 그는 황송하게도, 보잘것없는 나를 '성공가도(成功街道)에 놓인 걸림돌'로 간주, 끊임없이 견제했다. 예컨대, 내부정보를 고의로 차단해 업무수행을 방해하거나 근거 없는 악성루머를 퍼뜨려 사내 평판을 악화시킴으로써 회사에서 내 입지를 좁혀 나갔다. 피할 수 없는 진검승부. 그 후, 하루하루가 전쟁 같던 일상이 2년 가까이 이어졌다. (자의로 판단컨대) 결국 승리의 여신은 내게 미소를 던졌지만 입은 상처 또한 작지 않았다. 이제 무너져가는 '나의 천국'을 회복하고 꺼져가는 '영혼의 등'을 다시 밝히려 그 지긋지긋한 싸움을 시작하려 한다. 반드시 이겨줘야 한다. 성전(聖戰)이다.


만지작 거린 카드는 두 장이다. 하나는 용역 파견업체를 통해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 이슈화시켜 매니지먼트로 전선(戰線)을 확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장 내 갑질로 걸어 법적 소송으로 가는 것이다.

전자(前者)가 불미스러운 이슈 중심에 그녀를 몰아 놓고 사내 이미지를 손상시켜 차후 인사 평가에 악영향을 끼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면 후자(後者) 시나리오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보호 차원에서 법원이 사건을 원고 측에 우호적으로 해석해 승소 판결로 이어진 후 실직(失職)은 물론, 이 좁은 바닥에서 커리어 자체를 회복불능 상태로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건 치명타다. 좀 가혹하다.


' 잠깐. 그런데, 지금 내가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이것이 최선일까. 소리 몇 번 질렀다고 , 그게 뭔 죽을죄라고 남의 인생 포맷시킬 궁리까지 가는가. 극단적인 상황까지 머릿속에 넣는 나 자신이 섬뜩하다. 게다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성경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칠 수 있는가. 허울 좋은 명분으로 누군가에게 가해지는 위해(危害)는 해코지요 폭력이며 덕(德)을 쌓기는커녕 업(業) 지을 뿐이다.'


내 판단을 되짚어본다. 만약 조직 내 경쟁 속에서 저도 살아보려고 바둥대던 중 당일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고성(高聲)으로 터졌다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 그래서, 누구나 실수는 한다. 과거, 겁 없이 설치다 저지른 낯 뜨거운 내 실수를 이해해 주고 기꺼이 품어준 사람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그녀가 측은해진다. 약해지는 마음. 그리고, 만지작 거리던 카드를 내려놓는다. 그 서슬 퍼렇던 칼날이 무뎌진 것 같다.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선에서 '순한 맛'으로 따끔하게 마무리해야겠다. 나이를 먹어가나 보다.


그리고, 조직도상 리포트 라인에 있는 다른 메너지 손에 편지 한 장을 쥐어 주었다. 그 속에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 날짜, 시간, 장소, 내용 등이 아래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 그녀가 질러대는 소리는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슈퍼바이저로서 문자 한 통에 연기처럼 사라질 , 힘없는 파견직을 무시할 수 있고 소리 정도 질러도 되며 이는 목표 달성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야. 구직난에 니들에게 이만한 잡도 감지덕지인 줄 알아. 입 다물고 일이나 열심히 해'


letter to manager .jpg 매니저에게 건넨 편지 중에서


다음 날, 풀이 죽어 나타난 그녀는 자중하는 듯 보였다. 요조숙녀 흉내 내듯 입을 조물거리는 말투에 닭살이 돋았다. 내적 변화, 즉 메타노이아가 일어났는지 소나기가 쏟아져 피했을 뿐인지 바람이 불어서 누웠을 뿐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나를 조심하는 기색은 역력했다. 권력관계가 바뀐 것이다.

' 이제 어른을 좀 알아보는구나. 잘해라. 아저씨 잘 못 건드리면 아주 ''가는 수가 있다. '


조만간 '나의 천국'에 다시 봄이 찾아올 것이다. 그럼, 꽃구경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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