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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색 고양이를 찾습니다"

길 위의 친구, 그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by 그냥 하윤 Mar 18. 2025

그 고양이를 처음 본 것은, 운동화 끈을 묶기 위해 아파트 단지 놀이터 벤치에 잠시 앉아있을 때였다. 도시의 피로가 내려앉는 저녁 무렵, 미끄럼틀 아래에서 나른하게 하품을 하던 치즈색 고양이. 그날따라 유독 선명했던 놀이터의 풍경 속에서, 반가운 우연처럼 내 산책 가방 속에는 달이에게 간식으로 주려고 넣어둔 닭가슴살이 있었다.


한참을 멀찍이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어 닭가슴살을 풀숲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거리를 두고 지나치자 그제야 치즈색 고양이는 조심스레 그 자리에 와서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간식을 다 먹은 후에도 고양이는 그 자리에 남아 느릿하게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고양이를 뒤로 하고 달이와 함께 한강으로 향하던 길에 언니가 말했다.

“아까 그 고양이,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져서 너랑 닮은 것 같애.”


처음에는 웃어넘겼다. 고양이와 내가 닮았다니. 정말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 걸까? 그 말을 들은 이후 나는 놀이터를 지날 때마다 그 치즈색 고양이를 저절로 찾아보게 되었다.


졸린 눈. 얘도 나처럼 안검하수인가? 아니면 원래 그냥 눈이 긴 걸까?

그 고양이를 찾는 일은 나의 소소한 일상이 되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 혹은 저녁 산책을 나갈 때면 자연스럽게 놀이터 쪽으로 발걸음이 향했다. 때로는 미끄럼틀 아래, 때로는 그네 옆 덤불 사이, 가끔은 놀이터 입구 벤치 위에서 식빵을 굽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처음에 고양이는 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반가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고양이와 나는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는 도시인처럼, 존재를 인정하는 정도의 관계를 맺었다. 내가 다가가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너무 가까워지면 마치 오랜 사색을 접는 듯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의연하고 독립적인 존재감이 묘하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묘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놀이터에 나타나는 내 모습을 알아챈 걸까? 고양이가 나를 발견하면 "야옹" 하고 작은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가방에서 간식을 꺼내 건네면 잠시 망설이다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먹었다. 우리만의 작은 의식 같은 것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퇴근 길에 만나면 '야옹' 하면서 내가 집에 갈 때까지 따라오곤 했다

한 달쯤 지났을 때는 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내가 놀이터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네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날 보면 꼬리를 살짝 올리며 몇 걸음 다가왔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린다는 것, 그것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그렇게 한다는 사실이 묘하게 가슴을 따뜻하게 했다.


"오늘도 여기 있네."

"오늘은 어디 갔을까?"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내 하루에 스며들었다.


이 두 녀석들은 형제였을까?

몇 주가 지났을 무렵, 새로운 발견이 있었다. 익숙한 치즈색 고양이가 놀이터에 있을 때, 또 다른 치즈고양이가 가끔씩 녀석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아, 치즈 고양이가 두 마리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루는 내가 가져간 닭가슴살을 내려놓자 익숙한 치즈 고양이가 다가왔다. 그런데 다른 고양이도 함께 다가오려 하자, 내가 알던 고양이가 갑자기 앞발로 그 고양이의 머리를 툭 때렸다. 마치 "이건 내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 웃음이 나왔다.


그제야 나는 두 고양이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내가 알던 고양이는 눈이 크고 옆으로 길게 찢어져 있었고, 다른 고양이는 좀 더 동그란 눈에, 하얀 털의 비중이 더 많은 미묘였다. 아마 원래부터 두 마리가 있었을 텐데, 내가 관심을 갖기 전에는 그저 '치즈 고양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모두 묶어서 보았던 것이다.


관심이 개별성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것의 고유한 특성과 차이점이 드러난다. 그전까지는 그저 하나의 범주, 하나의 배경으로만 존재했던 것들이 갑자기 독립적인 존재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카메라 뷰파인더가 피사체의 초점을 맞추는 순간처럼, 흐릿했던 형상이 점차 선명해지며 그 존재가 또렷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간식을 탐내다 머리를 맞았던 그 치즈 고양이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놀이터 입구 앞에 공고문이 붙었다.

'시설 노후화로 인한 재정비 공사 안내.'

한 달가량 놀이터 출입이 통제된다는 내용이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치즈색 고양이도 보이지 않았다. 공사 중인 놀이터 주변을 서성이며 고양이를 찾아봤지만, 흔적조차 없었다. 공사 소음과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은 더 이상 고양이의 안식처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의 습관이란 참 아이러니하다. 관심이 가장 뜨거울 때는 그 온도를 유지할 것 같지만, 일상이라는 물결은 언제나 그 열기를 조금씩 식혀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찾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어느새 나는 숨 가쁜 일상에 쫓기며 치즈색 고양이의 존재를 기억의 서랍 깊숙이 밀어 넣고 있었다.


고양이가 사라진 후 나는 내 시야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시야라는 것은 단순한 광학적 현상이 아니라 의식의 방향이다. 우리 주변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매일 아침 화단에 물을 주시는 아파트 관리원분, 새벽 공기가 차갑게 식기도 전에 거리를 청소하시는 환경미화원분, 우체국 트럭을 타고 바쁘게 지나가는 집배원분... 그들은 분명 내 일상 속에 실재하지만, 특별히 의식의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그저 풍경의 일부로 용해되는 존재들이었다.


치즈색 고양이를 찾아다녔던 것처럼, 내가 의식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마리의 치즈 고양이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의 개별성과 고유함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인식하고, 누구를 쉽게 지나치는 걸까? 그 선택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 걸까?


어쩌면 우리의 관심은 한정된 자원처럼, 모든 것에 동등하게 나눠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의 존재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치즈색 고양이는 내가 보지 않는 시간에도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까.


츄르는 고양이들한테 그렇게 좋은 간식은 아니라고 한다. (고알못 시절이라 몰랐다)

놀이터 공사가 끝나고 새로운 외피를 입은 놀이터에는 예전보다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원색의 생명력으로 채색된 미끄럼틀과 그네, 깔끔하게 정리된 바닥. 모든 것이 새롭고 질서 정연했지만, 그 정돈된 공간 어디에도 치즈색 고양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완벽해진 풍경 속에서 불완전한 존재는 설 자리를 잃은 듯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놀이터를 지날 때면 여전히 나는 벤치 아래를 흘깃 들여다보게 되었다. 물리적으로는 더 이상 그곳에 없지만, 내 기억의 지도 위에서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존재.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놀이터 공사가 끝난 지 두 달쯤 지났을까. 여름의 밤, 하루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차장 구석 그림자 속에서 익숙한 치즈색 털빛이 섬광처럼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지나치던 공간에서 발견한 낯익음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일상의 틈새로 과거가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정말 그 고양이일까?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고양이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길게 찢어진 눈, 익숙한 무늬의 배치. 분명 그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내가 다가가자 반가운 듯 "야옹"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꼬리를 살짝 들어 올려 주차장 한편으로 나를 이끄는 듯했다. 마치 "그동안 어디 있었어? 이쪽으로 와봐." 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실은 내가 물어봐야 할 질문이었다.

그동안 어디서 지냈니? 놀이터가 공사 중일 때는 어디에서 쉬었니? 너의 일상은 어땠니?

물론 고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무언가 교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에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다시 서로의 시야에 들어왔다는 것.


우리가 서로를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것은 단순한 망막의 자극이 아니라 의식의 결단에 가깝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고, 세계 안에서의 그들만의 자리를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 말로는 소통할 수 없는 치즈색 고양이와 나 사이에서, '시선'은 단순한 감각이 아닌 하나의 언어가 되어 있었다.




그날의 만남은 어느덧 4년이라는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치즈색 고양이를 마지막으로 본 후,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다. 주차장에서 우연히 재회했던 그때의 기쁨을 마지막으로, 고양이는 더 이상 내 일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동안은 그 고양이를 의도적으로 찾아다녔다. 놀이터 주변은 물론, 아파트 단지 구석구석을 산책하며 익숙한 치즈색 털빛을 찾아다녔다. 더 좋은 곳으로 이사라도 간 걸까? 궁금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찾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일상'이라는 이름의 큰 물결에 그 기억이 씻겨 내려갔다.


지금은 그저 가끔, 아주 가끔 놀이터를 지날 때면 문득 떠오르는 추억이 되었다. "지금쯤 어디에서 잘 살고 있을까?" 내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그 고양이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막연한 믿음뿐이다. 그것이 내 기억 속에서 만의 이야기가 되었든, 실제로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든 상관없이.


나와 함께 놀이터를 걷던 달이도 그 사이 할배가 되었다.

우리 삶도 그런 것 같다. 모든 인연과 관계가 항상 눈에 보이는 형태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4년이라는 시간,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만남과 이별이 있었을까. 때로는 잠시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영원히, 혹은 그렇게 보이는 이별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의미 있는 만남은 물리적 거리나 시간을 초월해 우리 안에 계속 살아있다.


나와 닮은 눈을 가진 그 치즈색 고양이처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내면 풍경 속에서 특별한 의미의 좌표로 기억되는 존재일 수 있다. 비록 그들의 일상이라는 무대에 항상 등장하지 않더라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스크린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 사라짐과 나타남의 경계를 오가며,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남기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아닐까.


가끔씩 나는 동네를 산책하면서 문득 그 치즈색 고양이를 떠올린다.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가끔은 그 모습을 찾게 된다. 만남과 헤어짐이 일상처럼 반복되는 이 도시에서,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치즈색 고양이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 속에서, 오늘의 산책을 이어간다.


당신에게도 길 위의 친구가 있었나요?




 글은 브런치북  『멈춰 서서 바라보는 시간』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 같은 감정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봄은 모두에게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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