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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8회를 책임지는 사람들

스포트라이트 바깥에서 찾은 의미

by 그냥 하윤 Mar 21. 2025

7회 초, 2점 차 리드 상황. 선발투수의 얼굴에 피로가 역력했다. 90구를 넘긴 공은 이제 제구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마운드 위로 코치진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 순간 관중들은 알았다— 이제 선발의 역할은 여기 까지라는 것을.


한쪽에서 조용히 몸을 풀던 중간계투 투수가 일어났다. 경기 전부터 두 시간 넘게 언제 불릴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준비해 온 그였다. 관중들의 시선은 여전히 마운드 위 흔들리는 에이스에게 쏠려 있었지만, 그는 담담하게 불펜을 나서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그가 책임질 시간은 길어야 30분, 짧으면 단 세 명의 타자를 상대하는 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이 경기의 흐름을 바꿀 수도, 선발의 6이닝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라운드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무겁지만 단단했다. 환호도, 기대도 크지 않은 상황. 하지만 경기의 교두보를 지켜내는 그 역할의 무게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야구장 한편에 자리한 불펜은 특별한 공간이다. 관중석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고, 중계 카메라도 자주 비추지 않는 곳. 그곳에서 중간계투 투수들은 자신의 순간을 기다린다. 선발투수가 무너지는 순간, 마무리 투수가 등판하기 전까지의 간극을 메우는 임무를 맡은 그들. 특히 8회를 책임지는 셋업맨들은 경기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종종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 있다.


야구의 역사에서 ‘영웅’은 늘 선발투수였다. 한 명의 투수가 경기 내내 던지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부터, 선발은 마운드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영웅 서사 역시 선발투수에게 집중되었다. 팬들은 에이스의 어깨를 보며 희망을 걸었고, 감독들은 선발의 강한 어깨에 기대 승리를 설계했다. 시대가 변하고 이제는 중간계투 투수들이 경기의 판도를 바꾸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여전히 야구의 서사는 선발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불펜 투수들의 하루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오늘 등판할지, 몇 이닝을 책임져야 할지, 어떤 타자를 상대해야 할지 모른 채 매일 준비해야 한다. 출근했지만 일을 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날도 많다. 2시간 넘게 몸을 풀다가 결국 등판 기회가 오지 않으면 그 피로는 고스란히 다음날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든 최상의 컨디션으로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해야 한다. 선발투수들처럼 자신만의 루틴을 지키기도 어렵다. 그저 순간의 부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역설적이다. 그들이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해도, 사람들의 기억에 그리 오래 남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만루 위기를 틀어막거나 결정적인 상황에서 삼진을 잡아내는 특별한 순간들은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엊그제 8회는 누가 막았지?" 하고 며칠 후면 흐릿해지는 기억 속에서 조용히 이닝을 막고 지나간다. 선발이 6이닝을 던지고 마무리가 승리를 지키면 기사 헤드라인은 '에이스의 호투와 철벽 마무리'로 장식된다. 그 사이에서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던 불펜 투수에 관해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반면 불펜 투수가 단 한 번의 실수, 한 개의 홈런을 맞는 순간, 그들의 이름은 패배의 희생양으로 훨씬 선명하게, 더 오래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


작년 여름, 내가 응원하는 팀의 불펜 투수가 ‘이달의 MVP’ 팬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나 역시 매일 투표에 참여했고, 많은 팬들이 이 선수를 위해 SNS에 투표를 독려하기도 했다. 팬 커뮤니티에서는 "오늘도 투표했습니다" 인증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안정적인 활약으로 팀의 순위를 지켜냈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그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단 투표에서 다른 팀의 스타 선발투수에게 밀려 끝내 수상의 영예를 안지 못했다. 누구보다 묵묵히 마운드를 지키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지만, 결국은 선발투수의 존재감에 가려지고 만 것이다. 불펜 투수들의 헌신이 아무리 빛나도 그 가치는 쉽게 조명되지 않는 현실에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몇 주 뒤 친한 언니의 주도로 우리는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팬들에겐 당신이 MVP입니다" 라는 내용의 현수막과 정성스럽게 마련한 트로피를 그에게 전달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기뻐하던 선수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이후로도 시즌 마지막까지 그는 자신의 어깨가 으스러질 정도로 던지며 최선을 다했다. 늘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이들에게 진심 어린 응원 한 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야구장 밖을 돌아보면, 우리 삶 속에도 '중간계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엄청난 주목을 받지는 못하지만,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도록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이들. 대형 프로젝트의 시작과 완성 사이에서 묵묵히 진행 상황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자와 실무자, 유명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원고를 다듬는 숨은 편집자들, 응급실과 병동 사이에서 환자를 케어하는 간호사들.


그들은 종종 '대체 가능한'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직업윤리, 누구에게도 칭찬받지 못할 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 실패의 책임은 고스란히 떠안으면서도 다음 날 다시 제자리에 서는 회복력. 이런 모든 것들이 그들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현대 사회는 종종 '드라마틱한 성공'만을 성공으로 인정한다. 화려한 수상 소감,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순간, 모두가 주목하는 성취. 하지만 중간계투 투수들의 세계는 우리에게 다른 종류의 성공을 생각하게 한다. 남들보다 빛을 덜 보더라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 화려하지 않아도 믿음직한 것, 한 순간이 아닌 꾸준함으로 인정받는 것.


진정한 성공이란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스스로의 확신일지도 모른다. 작년에 우리가 선수에게 선물한 트로피는 공식 기록에 남지 않겠지만, 진심은 분명 선수의 마음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노력도, 모두에게 보이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경기가 끝난 후, 인터넷에서 그날의 기록을 찾아보면 대개 승리 투수의 이름과 마무리 투수의 세이브가 굵은 글씨로 강조되어 있다. 중간계투진의 이름은 어딘가 작게 적혀있을 뿐이다. 하지만 야구팬이라면 안다. 그들이 없었다면 승리의 아름다움이 완성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삶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시작과 드라마틱한 결말 사이에는 수많은 '중간'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를 완성한다. 그림자 속에서 빛을 만드는 사람들, 연결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불펜에서 나와 마운드로 향하는 중간계투 투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의 등번호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어져도, 그 의미는 오히려 선명해진다.


우리 모두는 인생의 어느 순간, 누군가의 '중간계투'가 된다. 화려한 시작과 극적인 결말 사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숨결이 된다. 그것은 결코 미완의 상태가 아니라, 완성을 향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어쩌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스포트라이트 아래가 아니라, 그 사이의 붉은 흙먼지 위에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8회의 침묵을 완성한 셋업맨을, 누군가는 그 셋업맨의 뒷모습을 묵묵히 응원한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남기는 것은 화려한 기록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만들어낸 진심의 흔적이니까.





이 글은 브런치북  『멈춰 서서 바라보는 시간』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 같은 감정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봄은 모두에게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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