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아니라, 쾌락이었을지 모른다
일상에 치여 살면서 점차 낭만이 사라져 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면 유학과 여행에서의 추억을 곱씹어보곤 한다.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낯선 길을 걷는 것, 새로운 냄새와 처음 보는 풍경, 다른 눈동자 색의 사람들, 신기하게만 느껴지는 소리들... 나에겐 낯선 그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그 어떤 순간.
내가 없어도 늘 이어질 일상들이 세상엔 참 많은 것 같아서 스스로 작아지다가도, 그 풍경의 일원이 되는 체험들에 스스로 커지기를 반복하면서 24시간이 생생해지는 그런 경험. 그 자체가 벅차고 행복한 여정이었다.
물론 그 감정도 오래가진 않았다. 현실은 여전히 제 할 일을 하듯, 나를 일상이라는 지루한 리듬 속으로 끌어당겼으니까.
누군가 만든 짧은 밈 이미지에서 이상하게도 오래 머물렀다. 거친 비포장도로 위에 작고 얇게 포장된 아스팔트 구간. 인생의 대부분은 그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같고, 여행은 그 사이에 잠깐 깔린 아스팔트 구간 같다. 하지만 그조차 지나가면, 다시 덜컹거리는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동진 평론가가 했던 말이 자주 떠오른다. "여행의 행복은 반복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므로, 그것은 행복보다는 쾌락에 더 가깝다." 그 말에 동의한다. 여행에서 느끼는 기분 좋음은 환경의 낯섦과 일상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것은 지속 가능한 행복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해방감에 가깝고, 지나고 나면 그저 기억 속 반짝이는 조각으로만 남는다. 그래서 여행 후유증이 오는 것이고, 돌아온 일상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요즘은 여행을 안 가면 뭔가 뒤처지는 것 같은 분위기다. SNS만 켜도 '견문을 넓히고', '삶의 시야를 키우고', '자아를 발견했다'는 말들이 넘쳐난다. 여행을 통해 자신이 완전히 변했고,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는 포스팅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여행은 필수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이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잠깐의 숨구멍에 가깝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을 하면 할수록 현실이 더 또렷해진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사실, 언어 장벽의 현실, 익숙함의 소중함. 여행이 나를 성장시킨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정면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 떠나고 싶어한다. 삶이 너무 단조롭거나, 한계에 부딪히거나, 반복에 지칠 때. 여행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짧은 도피처이자 일시적인 변주다. 일상이 반복되는 베이스라인이라면, 여행은 그 위에 즉흥적으로 더해지는 짧은 솔로 파트와 같다. 화려하게 빛나지만, 결국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딱히 해답은 없지만, 가끔은 해답이 없어도 괜찮다. 그저 도로 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계속 달리기 위해 필요한 틈일 뿐.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1년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도 간다. 하지만 여행이 '나를 성장시키고 인생을 바꿨다'는 식의 말엔 쉽게 동의하지 못한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여행은 반복 가능한 행복이라기보단 짧은 쾌락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잠시 현실을 벗어나는 '틈'이지, 현실을 해결해 주는 '답'은 아니니까.
사실 나도 안다. 여행을 가장 간절히 원했던 순간은 늘 현실이 가장 버거울 때였다. 뭔가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피하고 싶어서’ 떠나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결국 현실이 지루하거나 버겁기 때문이었다. 인생이라는 도로가 너무 엉망이라, 그런 쾌락이라도 필요했던 거다. 그래서 여행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경계하게 된다. 그게 해답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은 좋다. 정말 좋다. 다만, 그걸로 나 자신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건 위험하다.
어떤 사람은 집 안에서 책을 읽으며,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며 세상을 느낀다. 또 어떤 사람은 매일 같은 산책길을 걸으며, 그 안에서 미세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한다. 삶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여행이 유일한 해답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여행을 좋아한다. 그게 쾌락일지라도 괜찮다. 쾌락도 인간에게는 필요한 감정이니까. 단지, 그걸로 현실을 잊거나 덮을 수는 없다.
결국 중요한 건, 비포장도로를 어떻게 걸어가느냐다. 가끔 만나는 아스팔트 구간에서 잠시 쉬어가면서, 다시 울퉁불퉁한 길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것. 그것은 마치 긴 호흡 사이의 깊은 들숨과 같다. 잠시 폐가 가득 차는 충만함을 느끼지만, 언젠가는 내쉬고 다시 일상의 호흡 패턴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여행이 아닌 현실 안에서 만들어가는 중이다. 때로는 포장된 길을 밟으며 평안함을 느끼고, 때로는 거친 자갈길을 걸으며 단단해진다. 인생이란 그 두 가지 길을 번갈아 걸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끔,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 위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여행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