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녹슬지 않는다, 오월의 빛처럼
매년 5월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랄라스윗의 '오월'. 어느 해 우연히 이 노래를 들었고, 그 이후로는 이상하리만치 매년 이맘때면 자연스럽게 생각나기 시작했다.
푸른 신록이 햇빛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리는 5월의 풍경처럼, 이 노래는 내 안에 고요하지만 선명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계절이 돌아오듯, 그 노래도 어김없이 돌아와 나를 멈춰 세운다.
"오월 너는 너무나 눈부셔 나는 쳐다볼 수가 없구나
엄마 날 품에 안고 기뻐 눈물짓던
아주 먼 찬란했던 봄이여
세찬 울음 모두의 축복 속에서 크게 울려 퍼지고
아주 많은 기대들 모여 날 반짝이게 했지
수많은 오월 지나고 초록은 점점 녹이 슬어도
따스했던 봄날의 환영을 기억해 나는 오월의 아이"
'오월의 아이'라 말하면 친구들은 농담처럼 "넌 오월생도 아니잖아?" 하고 반문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내 생일은 오월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오월에 한 번 더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세례를 받은 날이 5월의 끝자락, 봄의 마지막 즈음이었다. 그날의 성인 이름을 받아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고, 새로운 시작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그날을 두 번째 생일이라 부른다. 억지스럽지만, 나도 충분히 '오월의 아이' 자격이 있지 않을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이어진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우리를 길러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배우고 자란 시간을 되새긴다. 결국, 이 모든 날들은 ‘한 사람의 성장’을 둘러싼 관계를 기리는 시간이다. 누구나 어린이였고, 누군가의 손을 빌려 자랐으며, 어딘가에서 배움을 얻었다. 그런 의미에서 5월은 특정한 사람만을 위한 달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돌아보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각자의 '오월'을 품고 살아간다. 가능성으로 가득 찼던 시절, 열정이 앞섰던 순간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믿었던 때. 그때의 마음은 맑았고, 눈빛은 또렷했다. 그 모든 시작들이 우리 삶의 '오월'이 아니었을까.
물론 삶은 곧잘 예상과 어긋난다. 실패하고, 멈추고, 때로는 돌아가기도 한다. 처음 그리던 방향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예기치 않은 일에 부딪히기도 한다. 초심은 흐려지고, 기대는 현실 앞에서 조용히 무뎌진다. 초록빛이 조금씩 바래가듯, 기대는 현실과 부딪히며 조용히 색을 바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 오월의 잔광이 남아 있다. 그 빛은 시간 속에서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단지 형태를 바꾸어 우리 안에 남는다. 때로는 방향을 잃었을 때 꺼내보는 나침반이 되고, 멈춰 숨을 고르게 해주는 벤치가 된다.
돌아보면 찬란한 순간들 뒤에는 늘 누군가의 존재가 있었다. 나를 이끈 사람, 등을 밀어준 사람, 말없이 함께 걸어준 사람. 기억은 관계 안에서 완성된다. 5월이 관계의 달이라는 건, 아마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삶은 결국 관계로 이루어진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나와 세상. 그 관계들이 우리를 지탱하고, 때론 흔들고, 끝내는 성장하게 만든다. 그래서 5월은 단지 기념일들의 연속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다. 우리의 여정 역시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닌 '의미의 탐색'이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건 변한다. 꿈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때론 꿈과 달라 아쉽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다. 기대와는 다른 방향에서 더 단단해지기도 하고, 더 분명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오월의 진정한 의미는 찬란했던 이상 자체가 아니라, 그 마음을 품고 있었던 우리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오월이 기대만큼 푸르지 않더라도, 언젠가의 그 감정이 우리를 다시 걷게 만든다.
삶이 때로 비척거리더라도, 찬란했던 축복의 순간을 기억하는 한 ― 우리는 여전히 '오월의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