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기 위해 나는, 착륙하기 위해 떠난다
비행기가 속도를 내며 활주로를 달릴 때, 귀는 점점 먹먹해지고 주변의 소리는 희미해진다. 엔진 소리가 커질수록 오히려 세상은 고요해진다. 가장 시끄러운 순간에 도착하는 정적. 이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외부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채, 오로지 내 심장박동만이 귓가에 울린다.
삶도 그렇다. 결정의 순간마다 수많은 목소리가 날 향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멀게만 들린다. 결국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도 앞에서 우리는 혼자다.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고독이 무섭지만은 않다는 게.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언제나 혼자 견뎌내야 하는 것들이었다. 이륙 직전의 그 고독은, 어쩌면 삶이 가장 진실해지는 지점이다.
비행기가 구름 위로 떠오르면 세상은 축소된다. 복잡했던 도로는 단순한 선이 되고,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지상의 모든 것들이 축소판이 되어간다.
그제야 문득 깨닫는다. 그토록 커 보였던 문제들이 사실은 '거리'의 문제였다는 걸. 마치 손바닥으로 달을 가리듯, 너무 가까이 있었던 것들이 전부인 줄 알았던 것이다.
연인과의 다툼, 거래처와의 갈등, 통장 잔고, 그 모든 것들이. 시간이라는 고도를 두고 보면 그냥 작은 점이다, 지워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작아진 풍경은 더 아름답다. 혼란은 멀어지고, 삶은 잠시나마 균형을 찾는다. 어쩌면 삶의 문제들도 거리를 두고 보면 나름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갖는 것일까.
"좌석벨트 착용 표시등이 꺼졌습니다."
승무원의 목소리가 기내에 부드럽게 퍼진다. 안전벨트를 풀어도 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통제 가능해 보인다. 안전 매뉴얼은 완벽하고, 비상구는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구명조끼는 좌석 아래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진짜 위기가 찾아올 때 이 모든 매뉴얼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모든 게 준비된 듯 보이지만, 위기는 늘 매뉴얼 바깥에서 온다. 조용히, 예고 없이, 우리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순간에.
인생도 그렇다. '공부 → 대학 → 직장 → 행복'이라는 인생 시뮬레이션은 누구의 착각이었을까. 실제 삶은 계획과 계획 사이에 번진 잉크 자국이었다. 예상치 못한 실패들, 계획에 없던 이별들, 준비되지 않은 선택들이 연달아 찾아왔다. 지우려 할수록 더 번지는, 그런 얼룩들의 연속이었다.
기내 방송이 약속하는 평화로운 비행처럼, 우리는 늘 안정을 갈망한다. 하지만 정작 기억에 남는 것은 평온한 순간들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었던 난기류의 순간들이다.
갑자기 비행기가 흔들리던 그 순간, 하필 나는 좁은 기내 화장실에 있었다. 벽을 짚고 균형을 잡았지만 흔들림은 집요했다. 공간이 좁을수록 공포는 더 확대되는 것 같았다.
삶의 위기도 이와 닮았다. 마치 좁은 밀실에 갇힌 것처럼 느낀다. 실직의 순간, 이별의 순간, 질병을 마주한 순간. 그 모든 순간들이 비좁은 화장실에서 맞은 난기류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 인간은 참 쉽게 '혼자'라고 믿는다. 마치 세상에서 나만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그러다 결국 문을 연다. 넓은 기내는 여전히 흔들리고, 다른 이들도 같은 진동을 견디고 있다. 위기는 여전히 있지만, 고립은 아니다. 이 단순한 사실이 사람을 버티게 만든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면서 약간의 어지러움이 찾아온다. 귀가 다시 먹먹해지고, 속이 미묘하게 울렁거린다. 창밖의 풍경은 점점 선명해진다. 흐릿했던 건물들이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내고, 사람들의 모습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현실이 고도를 낮춰 다시 내게 가까워질수록, 하늘 위로 밀어 올렸던 삶의 무게들이 서서히 중력처럼 몸 위로 내려앉는다. 집으로 돌아가면 마주해야 할 일들, 미뤄둔 결정들, 풀리지 않은 문제들. 비행 중에는 그 모든 것들이 구름 아래 있었는데, 이제 다시 나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착륙을 앞둔 이 순간의 어지러움은 꿈과 현실이 다시 만나는 지점에서 느끼는 감정과 닮아 있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의 씁쓸함, 휴가 마지막 날의 우울함, 좋은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공허함. 아름다운 것들은 유독 짧다. 비현실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어지럽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 현실의 무게가 그만큼 물리적이라는 뜻이다.
바퀴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 비행기는 거칠게 흔들린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다. 꿈에서 현실로 깨어나는 충격이다. 그 순간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중력의 무게다. 착륙과 함께, 비행기는 다시 지상의 생명체가 된다. 꿈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현실로 착지한다.
그리고 우리도 다시 중력을 가진 존재가 된다. 그 순간 다시 느껴지는 삶의 무게. 어쩌면 우리는 이 무게를 잠시나마 잊기 위해 하늘 위로 도망쳤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내에는 안도의 정적이 흐른다. 누군가는 창밖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핸드폰을 켠다. 각자의 방식으로 현실로 돌아올 준비를 한다. 이륙과 착륙 사이에 있었던 모든 순간들 — 귀가 먹먹했던 그 순간도, 창밖 풍경이 축소되던 그 순간도, 그리고 난기류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던 그 순간도— 모두 이제 기억이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며 나는 알아차린다. 하늘 위에서의 시간은 결국 땅으로 돌아오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 짧은 부유의 시간 동안 우리는 삶의 무게를 잠시 잊었지만, 결국 그 무게를 견디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리하여 삶이란, 귀가 먹먹하도록 혼자 견디고, 때로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예상치 못한 흔들림에 몸을 맡기면서도, 결국 다시 땅 위에 발을 딛기 위한 긴 비행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우리는 날마다, 천천히, 조용히 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작은 흔들림 속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