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면 떠오르는 감정의 색
초여름이 되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더위에 아직 적응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주말부터는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해는 길어졌지만, 공기는 축축하게 무거워졌고, 저녁이면 창문 너머로 눅눅한 바람이 들어온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한껏 가벼워졌지만, 마음속은 오히려 더 눅진해진다.
이런 계절이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왕가위의 '아비정전'. 그 영화는 줄거리보다 감각이 먼저 다가온다. 숲이 흔들리는 장면들, 축축한 벽지, 무심히 흐르는 시간. 기억에 남는 건 이야기의 흐름이 아니라, 눅눅한 공기 속에 둥둥 떠다니는 몇 개의 장면들이다. 마치 백일몽처럼, 깨어나면 대부분은 흐려지고 감촉만이 남는다.
스물 한 살의 어느날,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초록이 이렇게까지 우울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초록은 보통 착한 색으로 분류된다. 회복, 치유, 안정 같은 키워드를 달고 다닌다. 식물과 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색, 보통은 위로를 주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 색은 내게 좀 더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숲이 너무 깊어지면 안쪽이 보이지 않듯, 초록도 너무 짙어지면 안정을 주기보다 오히려 감정을 짓누른다. 그 안엔 빛보다 그림자가 많다. 아비정전의 초록은 바로 그런 종류의 초록이었다. 살아 있는 색이 아니라,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정서의 배경.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색.
그 색을 더 무겁게 만든 건, 습기였다. 습기는 정중하게 머무른다. 공기 중에 떠 있다가 스며들고, 스며들다가 눌러앉는다. 존재감은 없는데 무게는 있다. 감정도 그렇다. 겉으론 아무 일 없는 듯 굴지만, 어느 날 천장 틈에 남은 물자국처럼 드러나기도 한다. 잊었다고 믿었던 감정이, 문득 스쳐 지나가는 공기에 되살아날 때가 있다.
장마의 눅눅함이 슬픔을 증폭시키는 건 그래서다. 감정이 마를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기억 속에도 습기가 있다. 장면보다는 감촉으로 남아 있는 기억들. 창틀에 피던 곰팡이, 마르지 않던 이불, 물에 젖은 냄새. 그 시절 누구도 대놓고 슬퍼하진 않았지만, 공기가 괜히 무거웠다. 이불도 잘 안 마르고, 기분도 마찬가지였다. 말보다 오래 남는 감정들. 이건 진공포장이 안 되는 종류라 그냥 눅눅한 채로 붙어 있다. 나는 그때를 떠올릴 때 온도를 먼저 기억한다. 그리고 초록을 떠올린다. 너무 짙은 초록. 설명되지 않는 고립감.
나는 지금도 초록을 조심스럽게 본다. 어떤 날엔 위로가 되고, 어떤 날엔 더 깊은 혼잣말로 빠지게 한다. 같은 색인데도 얼굴이 다르다. 초록이 그렇다. 그리고 장마는 그 얼굴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눅눅한 공기 속에서는 감정이 숨길 생각을 안 한다. 다른 계절엔 무시하고 지나쳤던 감정들이, 이 계절엔 얇은 비닐처럼 피부에 들러붙는다.
그건 단지 감정의 문제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내 기억도 늘 그랬다. 어떤 특별한 사건보다는, 이상하게 남는 건 분위기였다. 장면의 흐름은 흐릿해져도, 공기 중에 떠 있던 냄새, 빛의 방향, 내 몸이 감지한 온도 같은 것들은 오래 남는다. 그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그 말이 떨어졌던 공간의 기류는 또렷하게 떠오른다. 결국 사람은 구체적인 일을 잊고, 감각을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장마가 시작되면 나는 자꾸 예전 생각을 한다. 꼭 슬픈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운이 빠지는 감정. 오래전 기억도 습기를 먹고 다시 살아난다. 이 계절엔 감정이 잘 자란다. 물만 주면 된다. 초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