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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빛이 아주 멀리 닿기를

삶과 죽음 사이, 얇고도 명료한 경계에 대하여

by 그냥 하윤

가끔 성당에 들러 봉헌초를 켠다. 누군가 아플 때, 가까운 사람이 지쳐 있을 때, 혹은 내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


그날도 평소처럼 초를 꺼냈지만, 마음은 조금 달랐다. 이미 떠나간 사람을 위해 처음으로 초에 불을 붙였다.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던 사람.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러고 싶었다. 그 불빛이 어둠을 조금 덜어주듯, 그에게도 조용한 안식이 닿기를 바라면서.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들 한다. 그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은 대개 갑작스레 찾아온다. 방금 전 함께 웃고 이야기하던 이가 몇 시간 뒤,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오늘 아침 무심코 나선 현관문을, 다시는 열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우리는 그 불확실함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일상을 유지하는 방식이니까.


나는 내일의 나를 위해 오늘을 살아간다. 그러나 만약 내일이 없다면 오늘의 이 치열함이 너무 허망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결국 우리에게 진짜로 주어진 것은 오늘뿐이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약속일뿐. 마치 비 온 뒤 아스팔트 위에 고인 물웅덩이처럼, 해가 뜨면 자취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를.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시간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사사'는 현재와 기억의 시간, '자마니'는 과거와 망각의 시간. 세상을 떠나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면, 그는 여전히 '사사'의 시간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면, 그는 비로소 '자마니', 영원한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이 개념에 따르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죽어도 살아 있는 것이다.


기억은 그래서 또 다른 형태의 생명이다. 마치 겨울을 견디는 나뭇가지 끝에 봄의 새싹이 숨어 있는 것처럼.


2018년 가을, 명동성당에서 들었던 한 신부님의 강론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의 무신론자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제가 된 아들을 거부하고 수년간 연락을 끊었던 아버지. 임종을 앞두고 다시 만났고, 아버지는 세례를 받고 새로운 이름과 함께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날 이후 신부님은 미사 전마다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올린다고 했다. 기도는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와 이어지는 대화라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말은 이상할 만큼 믿음직하게 들렸다.


기도는 어쩌면 망각에 저항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이름을 부르고, 존재를 기억하는 일. 그것은 마치 다 타버린 성냥개비를 들고 다시 한번 불을 당겨보는 것과 같다. 불가능해 보여도 그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 그 작은 불빛은 떠난 이들과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지 않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마치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처럼.


그리운 이들이 떠오르는 날이면 나는 가끔 성당에 들러 봉헌초 하나를 켠다. 삶의 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뿐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고 싶다. 기도는 단순한 입술의 움직임이 아니라, 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일이니까. 그 지도 위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생각보다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이제는 그가 은총 안에서 평화를 누리기를. 이 소망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삶과 죽음 사이의 얇은 종이를 살짝 접어 더 가깝게 만드는 행위다. 그리고 언젠가, 그 접힌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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