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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종이 한 장이다.

종이보다 중요한 것은 ‘같이 있고 싶은 마음’

by 마담 히유

'결혼은 계약일뿐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땐 너무 정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인데 계약일뿐이라니.


하지만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 보니,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프랑스에는 혼인신고 없이 함께 사는 커플이 아주 많다. 아이를 낳고, 집을 사고, 함께 세월을 보내면서도 법적으로는 '결혼하지 않은 사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처음엔 신기했다.

한국 같았으면 이미 여기저기서 들려왔을 말들.

언제 결혼할 거야?

애도 있는데, 혼인신고는 해야지 않겠어?

아니, 사실 아이를 갖기 전부터 이미 결혼 압박이 시작됐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런 압박이 거의 없다.


행복하게 잘 지내면 됐지, 꼭 종이 한 장이 필요해?


그만큼 프랑스에는 결혼 외에도 다양한 ‘함께 사는 방식’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PACS(Pacte civil de solidarité) '시민연대계약'으로, 일반적으로 '동거계약'이라고 불리며 결혼과 비슷한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간편한 제도다. 절차도 비교적 간단하고, 결혼처럼 호적(?)에 적히지도 않아서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더 지킬 수 있다는 이유로 많은 커플들이 선택한다.


처음엔 "그럼 그냥 결혼하지, 왜 굳이 PACS를 해?" 싶었지만, 프랑스 사람들에겐 이게 더 자연스러운 선택인 경우도 많다. 결혼처럼 무겁게 느껴지지 않고, 또 필요하다면 비교적 쉽게 정리할 수 있다는 실용성도 있다. 사랑의 시작도, 끝도… 너무 거창할 필요 없이 현실적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게 인상 깊었다.


결국 종이 한 장일지라도, 그 위에 적힌 이름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더 중요하고, 그 종이 없이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건 어쩌면 더 깊은 신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프랑스에 살다 보면, 결혼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더 가볍고, 동시에 더 깊게 느껴진다.




남편의 사촌형은 파리 근교에 직접 직은 큰 단독주택에서, 여자친구, 아들하나 딸 하나,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 사촌형의 딸아이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아서 작은 선물을 들고 그 집에 놀러 갔다. 그 여자친구분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내가 물었다.

"로헝이랑 둘이 PACS (동거계약)는 했어요?"

"아니, 우린 아무것도 안 했어. 하지만 우린 가족이야"


이 대화가 나의 "가족"에 대한 정의와 결혼에 대한 생각을 180도 바꿔놓았다.

결혼만이 가족을 정의할 수는 없다는 것, 매우 당연하지만 생각하지 않았던 사실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생각이 꽤 보편적이다. 결혼이란 건 결국 법적 계약일뿐이고, 그 자체가 사랑이나 책임감을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것 또한 결혼 생활을 하면서 종종 느낀다. 서로를 향한 태도, 일상에서의 선택, 함께하는 방식이 더 중요하지 도장 하나 찍었다고 마음이 자동으로 영원해지는 건 아니니까.


물론, 그 종이 한 장이 주는 안정감이나 책임의 무게도 분명 있다. 보험, 세금, 자녀 문제, 각종 행정처리... 프랑스 행정 시스템 안에서는 이 ‘종이 한 장’이 없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차이가 크다. 그래서 종종 프랑스인들도 현실적인 이유로 결혼을 하기도 한다. 사랑의 결실이라기보다는 행정적 효율을 위한 선택. 가끔은 그런 현실적인 면이 결혼을 더 '차갑게' 보이게 만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적인 사랑'이 가능해지는 건 아닐까 싶다.



한국처럼 결혼 자체가 하나의 '목표'가 아니라, '선택지'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문화. 그 안에서 오히려 더 솔직한 관계가 유지되기도 한다.


요즘은 누가 "결혼은 종이 한 장이야"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결국 중요한 건 그 종이가 아니라, "그 종이가 있든 없든 없이도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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