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잘해야 된다는 의무도 없이, 당신만을 위해
나는 프랑스에서 한국 회사에 다닌 적이 있다.
그나마 "한국물"이 좀 빠진 사람으로 취급받던 나는, 프랑스인 동료들에게 종종 한국인들의 말투나 행동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해주는 역할을 했더랬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한 동료가 이상하다는 듯 물은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한국 사람들은… 왜 취미가 없어?"
기분이 살짝 상했지만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왜 취미가 없어?"
"그러니까, 주말에 뭐 했냐고 물어보면 다들 잤다, 넷플릭스 봤다, 가끔 친구 만났다... 그런 얘기밖에 안 하잖아. 취미가 없어."
이 오만함에 반박이라도 하려다가, "뭐, 취미 없는 사람도 있지." 하고 말했더니 이렇게 되묻는 게 아닌가.
“Alors... ils vivent pourquoi?” (그럼... 뭐 위해 사는 거야?)
처음엔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지만, 시간이 지나고도 이 질문이 좀 묵직하게 남았다.
내가 만난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각자의 "열정"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어릴 때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수요일을 "취미의 날"로 본다.
공립 유치원과 초등학교 대부분은 수요일에 수업이 없고, 중·고등학교도 보통 수요일 오후는 비워져 있다.
그 이유는 "학교에 일주일 내내 나가면 아이들에게 학업 부담이 되기 때문"인데, 토요일까지 학교에 나갔던 "라때"를 생각하면 좀 당황스러운 발상이긴 하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수요일에 뭘 하느냐?
부모가 직장에 나가야 하는 경우, 시청(Mairie)에서 운영하는 ‘수요일 방과 후 돌봄(Accueil du mercredi)’ 서비스를 신청할 수 있고, 가능하다면 수요일은 오로지 취미활동에만 시간을 쏟는다.
수영, 펜싱, 테니스, 승마, 도예, 연극 등... 프랑스 아이들은 수요일마다 다양한 활동을 체험하며 어릴 때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찾아 나간다.
물론 처음에는 부모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3살 배기 아이가 본인의 방과 후 활동을 직접 고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까. 부모의 도움으로 여러 활동을 해보면서, 자신이 평생 할 수 있는 취미를 찾는 식이다.
나도 사실 중학교 때까지 피아노, 태권도, 검도 미술 같은 걸 배워본 적은 있다.
하지만 중3이 되자 모든 '공부 외의 학원'은 정리되었고, 그 이후로는 오직 내신과 입시만을 위한 학원만 다녔다. 그렇게 자연스레 취미의 리듬은 끊겼고, 어떤 것도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반면 프랑스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부분 수준급의 취미 하나씩은 갖고 있었다.
테니스면 테니스, 수영이면 수영, 피아노면 피아노.
꼭 예체능만이 아니라, 목공이나 정원 가꾸기, 비건 요리, 낚시 같은 활동도 있다.
공부에 너무 쏠리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거다.
실제로 프랑스 사람들은 일 외의 삶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회사가 끝난 저녁이면 요가를 하러 가고, 주말이면 도예 수업이나 수채화 워크숍, 뜨개질 모임을 간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한 동료를 만났다.
지금 회사는 회사 단지라서, 출퇴근을 제외하면 차 없이는 어디 이동하기 힘든 곳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가, 스몰톡을 하다가 내가 그날따라 차를 타고 뭘 사러 쇼핑몰에 간다는 이야기를 하자 눈이 반짝이면서 자기를 좀 태워다 줄 수 있냐고 부탁하는 게 아니던가.
알고 보니 그 친구는 그림을 그렸는데, 그를 위한 캔버스와 붓, 물감을 사야 한다고 했다.
"너 그림 그려?"
"응 보여줄까?"
그렇게 본 동료의 그림은, 솔직히 말하자면 보잘것없었다.
아무런 기교도, 기법도 없는 초등학생이 그린듯한 투박한 날것 그대로의 그림.
'어떻게 표정 관리를 하지' 고민하던 찰나, 그 친구가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나도 내가 잘 못 그리는 거 알아. 근데 이건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리는 것도 아니고, 잘 그려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그냥… 내가 좋아서 그리는 거야."
나는 왜 취미는 "잘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좋아하는 것, 그 자체로도 충분한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경쟁할 필요도 없고, 완성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 무엇.
그냥 좋아서, 그 시간을 살아 있다는 감각으로 채우는 것.
그 친구 덕분에 나는 "취미"라는 단어에 담긴 무게를 조금 덜어낼 수 있게 되었고, 내 삶이 살짝 덜 피곤하게 되었다.
나도 그렇지만, 꽤 많은 한국인들은 '취미'와 '특기'를 구별하지 못한다.
아니, 취미로 시작을 했더라도, '특기'가 되지 못하면 금세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쪽이 더 맞을지도.
나는 뜨개질을 좋아한다.
한 코 한 코 실을 뜨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작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꽤나 만족스럽다.
하지만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뜨개질로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에 한동안은 열심히 따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사람마다 주어진 능력치는 다르다. 그 사람은 정말 재능이 뛰어났던 것이고 (밥벌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나는 그냥 뜨개질을 좋아하는 사람-에 그칠 정도의 능력이었던 것.
이 사실을 깨달은 나는 약간 흥미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사실 내가 뜨개질을 잘해야 할 의무는 없다.
정말 "취미"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한코 한코 떠가면서 마음이 편해지면 그만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서,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일상의 한 부분을 몽글하게 채우기 위해서 하는 일.
비뚤비뚤하고 완성도가 낮아도 괜찮다.
어차피 완벽함이 목적이 아닌 시간이니까.
이곳에서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가는 나는, 큰 욕심은 없지만 단 하나, 아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게 있다.
평생 취미를 만들어 주는 것.
나 역시도 "특기"가 아닌 진짜 "취미"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뭔가를 시작하면 자꾸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는 이 한국인 마인드는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아이들만큼은, 그 첫 단추를 내가 잘 꿰어주고 싶다.
내 아이들에게, 세상이 아닌 본인의 마음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작은 취미 하나를 꼭 선물하고 싶다.
그거면 삶은 생각보다 꽤 오래, 부드럽게 그리고 행복하게 굴러갈 테니.
그러니까, 당신도 취미를 하나쯤은 가져라.
요란하지 않아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