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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인생을 운에 맡겨라

택배도, 행정업무도.

by 마담 히유


프랑스에 살다 보면, 한 가지 중요한 덕목이 생긴다.
인생을 너무 계획대로만 살려고 하지 말 것.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차피 인생을 계획대로 사려고 해도 그렇게 살 수가 없으니, 포기하고 맘 편히 가질 것."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나는 모든 걸 미리미리 준비하고 확실한 확인 메일을 받고, 뭔가 진행되면 바로 다음 단계를 밟는 식의 소위 MBTI J 같은 "정갈한 삶"을 꿈꿨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살면서 그런 마음은 하루가 멀다 하고 꺾였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지만, 택배 도착 예정시간이 "8h ~ 20h 사이"라는 메시지를 보다 보면 이젠 기가 차는 걸 떠나서 아무런 감정이 없어진다.


열두 시간 동안 집에 있으라고...? 맞다. 심지어 기다렸는데 택배는 안 오고, 나중에 확인해 보면"수취인 부재로 배송 실패"로 뜨는 경우도 많다.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있었는데? 누가 벨은 누르고 간 걸까? 내가 화장실 간 사이였나?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냥 운이 나빴던 거다.


행정 업무도 마찬가지다. 서류를 우편으로 보냈는데 사라졌다.

전화했더니 "담당자가 휴가 중이에요." 메일 보냈는데 "아직 확인 못 했어요, 다시 보내주세요."
온라인으로 신청했더니 "서류가 누락됐습니다, 원본으로 다시 보내주세요."
....? 처음부터 사본받는다고 적혀있었는데...?...




내가 10년 체류증 승인을 받고 기다리던 때,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더랬다.

똥줄(?) 타기 시작한 나는 온갖 방법을 통해 경시청에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버린 경시청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경시청에 찾아갔지만, 경시청에서는 "예약 없이는 출입 불가"라는 이유로 나를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일단 아무렇게나 다른 건으로 예약을 한 뒤에 경시청에 잠입(?) 해서 내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체류증을 받을 수 있었다. 10년짜리 체류증인데 1년 뒤에서야 받았으니 9년 체류증을 받았달까.

그리고 내가 체류증을 받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버튼을 누르는 것을 잊었기 때문".


여기서 화가 난다면 하수다. 진정한 고수는, 기뻐하면서 체류증을 받아간다.

나는 이제 프랑스 라이프 고수다.





처음엔 이런 일들에 “한국이었으면…!” 하며 분노하고, 좌절하고,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받아들이게 됐다.

이건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런 나라다.


프랑스에서 행정 처리를 할 땐 마치 슬롯머신을 돌리는 기분이 든다. 한 번에 끝나면 대박이고, 두 번 세 번 걸리면 "뭐, 원래 그렇지" 한다. 심지어 어떤 날은, 아무 기대 없이 우편을 보냈는데 일주일 만에 일이 "완벽하게" 처리돼 돌아오기도 한다. 이곳은 프랑스. ça dépend의 나라다.


싸데뻥 ça dépend 이란 "상황에 따라 다르다"라는 의미로, 모든 상황에서 그때그때 다른 태도, 기준을 이르는 말이다. 좋게 따지자면 "상황에 따라서", 나쁘게 따지자면 "일관성 없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만큼 프랑스 문화와 정서를 잘 나타내는 말도 없을 듯하다.





그래서 이젠, 중요한 행정 처리를 끝내고 나면 어깨에 힘을 빼고 이렇게 말한다.

"끝났어? 됐어. 그럼 이제 우주에 맡기자."


택배가 오든 말든, 서류가 잘 처리되든 말든, 나는 오늘 할 일은 다 했다.


인생도 좀 그렇지 않나.
열심히 준비하고, 정성껏 노력했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결과를 운에 맡길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프랑스는 그런 여유를, 강제로라도 갖게 해주는 나라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니 가끔은 인생을 운에 맡겨라.
택배도, 우편도, 행정 업무도, 그리고 우리 인생도.

이 모든 게 어디선가 정해진 흐름과 계획에 따라 흘러가는 게 아니라, 어쩌면 그냥 그날그날 운과 리듬에 따라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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