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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1/2)]
빛나는 내일을 꿈꾸며

by 온명 Mar 3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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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글 이미지 1


 중경삼림은 홍콩의 역사적 배경과 상징이 담겨 있다고 알려진 왕가위 감독의 유명한 영화지만, 나는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었음에도 이 영화를 너무 재밌게 봤다. 그런 배경에 대한 이해가 이 영화의 본질이었다면 이 영화를 이토록 재밌게 볼 수 없었을 터. 나는 이 영화에서 어째선지 그리움 가득한 사랑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청춘들의 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오래된 영화와 빛바랜 색감...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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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벗어날 용기


"매일 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가지만 아마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언젠가는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정말 가까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가족 관계도 알고 부모님과 전화 통화도 할 만큼 오래 만난 연인 메이와 헤어진 223은 한 달이 넘도록 메이를 잊지 못하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223은 만우절에 헤어지자는 말을 한 메이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했다. 그는 파인애플을 좋아했던 메이를 떠올리며, 헤어진 후로 한 달간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기 시작한다. 헤어진 지 한 달이 되는 날은 5월 1일로, 그날은 223의 생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인 5월, 그녀가 좋아하는 파인애플, 그리고 그녀를 좋아하는 자신의 생일. 좋아하는 마음으로 연결된 그날이 기적을 일으키기를 바라며, 223은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 사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유통기한은 이제 하루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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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약 운반책인  금발 머리에 버버리코트를 입은 정체불명의 여인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인도인들을 이용해 마약 밀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옷과 구두, 가방, 짐 곳곳에 마약을 숨겨 공항으로 이동한다. 어째서 이 과정을 바라보는 내가 이리도 불안할까. 마약을 잔뜩 숨긴 한 무리의 인도인을 이끌고 홀로 공항으로 인솔해 온 게 실수였던 걸까. 인도인들이 사라졌다. 임무에 실패한 여자는 바에서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통조림을 건네받는다. 통조림의 유통기한은 여자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뜻했다.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사라진 인도인들과 마약을 찾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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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러 찾은 가게에서는 더 이상 5월 1일 파인애플을 찾을 수 없었다. 5월 1일이 코앞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진열해 놓을 리 없었다. 유통기한이 다 되어버린 통조림은 상품성을 잃고 쓰레기 취급을 받는다. 223은 그런 대접을 받는 통조림에게 감정 이입을 한다. 5월 1일을 기다리며 파인애플 통조림을 기다리던 223은 폐기되는 통조림과 자신의 사랑이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223은 폐기 통조림 한 무더기에서 파인애플 통조림을 찾으며 '유통기한이 없는 게 이 세상에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자신의 사랑도 정말 유통기한이 지나 이 통조림들처럼 폐기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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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인도인 무리를 찾아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홍콩이란 도시에서 인도인 집단의 유대는 꽤나 끈끈한 모양이다. 한 인도인의 딸을 유괴하고 협박해봐도 아무런 단서를 얻을 수 없었다. 아이스크림 잔뜩 사 먹여 아이를 기분 좋게 만들고 한 시간도 안 지나 돌려주는 유괴와 협박이라니,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해야만 했다. 인도인 무리에게 습격을 당하는 여자. 도심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그녀는 죽음의 경계에서 달리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간신히 그들을 따돌렸지만, 그녀가 이 일을 수습하기엔 늦어버린 건 아닐까. 점차 죽음이 가까워지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최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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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일 아침이 되어서야 223은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눈앞에 쌓인 파인애플 통조림 더미에서 하나씩 꺼내 먹기 시작한 223은 기어코 파인애플 통조림 30개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술집을 찾은 223은 파인애플 탓인지, 속을 게워내야만 했다. 223은 자리에 앉아 이 술집에 들어온 첫 번째 여인과 사랑에 빠지겠노라 다짐한다. 때마침 들어온 금발의 버버리코트를 입은 정체불명의 여인. 슬쩍 옆자리에 앉아 '파인애플 좋아해요?'라는 말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두 남녀 사이를 이어보려 노력한다. 이별로 인해 공허한 마음을 달랠 길 없는 남자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간신히 한숨 돌리려 술집을 찾은 여자. 생사의 갈림길 위에서 간신히 찾은 휴식을 방해받은 여자도, 그런 여자에게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잘 될 가능성이 없었기에 남자에게도, 이 만남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 눈 질끈 감게 만드는 서로 불운한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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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가 이별했다고 착각한 남자는 필요하면 자신의 어깨를 빌려주겠다고 말한다. 그저 밀어낼 뿐인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가능한 일이긴 할까. 이 남자는 대체 왜 처음 보는 나를 이해하려 이리도 부단히 노력하는 걸까. 하지만 어느새 바에서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빌려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남자에게 관심도 없었고 빈틈도 보이지 않으려 했건만, 결국 이 무해하고 순수해 보이는 남자의 진정성이 닿았던 걸까.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 남자에게 위로를 받고 어딘가 변화를 겪은 건 아닐까.


잔뜩 취한 여자는 남자에게 호텔에서 쉬자고 말했다. 쉰다는 말이 정말 문자 그대로 잠을 자고 쉬자는 말이라는 걸 호텔 침대에서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깨닫는다. 밤새 남자는 여자 곁을 지켰다. 그저 야식을 먹으며 영화 두 편을 보았을 뿐, 쉬는 여자를 털끝도 건들지 않았다. 아니, 단 한 번 건드렸다. 동이 틀 무렵, 방을 떠나기 전에 여자의 발에서 그 날의 사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하이힐을 벗겨 자신의 넥타이로 열심히 닦아주었다. 그리고 하이힐을 침대 아래 두고 조용히 방을 떠난다.


 남자가 느낀 외로움은 육체적 외로움이 아니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이별 후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그렇게 사람을 찾아다녔나 보다. 마침내 낯선 여자를 만나 호텔에 왔건만, 이별 위에 새로운 사랑을 덮어씌운다고 지난 사랑이 잊혀지는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남자는 밤새 영화를 보며 지난 사랑을 정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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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을 떠난 남자는 비 오는 운동장에서 조깅을 했다. 더 이상 자신을 찾는 이가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삐삐도 이 운동장에 버리고 떠나려 했다. 하지만 뒤돌아 떠나는 남자의 뒤에서 울리는 삐삐 소리에 남자는 황급히 뛰어와 삐삐를 확인한다.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밤새 홀로 마음을 정리했다고, 조깅하며 수분을 조금 빼냈다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질 리 없다. 하지만 누군지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여자가 남긴 생일 축하 메세지는 남자에게 지난 사랑의 기억을 딛고 나아갈 용기를 주었다. 특별한 이번 추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남자는 기억에는 유통기한이 없길 바라며, 자기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은 건 남자뿐만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의 보스로 추정되는 남자를 총으로 쏘고 떠난다. 이후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을지,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자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껏 당연히 금발이라고 생각했던 여자의 머리는 가발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금발 가발을 벗어 던지고 자리를 떠난다. 가발과 함께 어두운 과거와 관계들을 모두 버리고 떠나는 여자의 발걸음은 한결 홀가분해 보였다. 바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은 건 아니었을까.


[중경삼림(2/2) 빛나는 내일을 꿈꾸며] 이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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