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입문의 모든 것
이 글을 쓴 이유와 이용하는 방법
이제까지 초보자의 법철학 입문을 도와주는 것을 목표로 법철학사를 가볍게 개관하는 한국어 자료가 없었습니다. 도서는 더러 있지만 입문으로 읽기에는 다소 양이 방대한 점도 있고, 애당초 어떤 도서가 입문에 적절한 지조차 그야말로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분별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는 법학과 혹은 철학과 내지는 정치학과에 재학하면서 법철학을 '처음' 독학하기로 마음먹은 학부생 혹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합니다. 또 LEET 대비를 위해 실용적으로 법철학을 가볍게 공부하려는 로스쿨 준비생들도 대상에 포함됩니다. 따라서 이 글은 독자가 대학생 수준의 교양 지식은 갖췄다는 전제 하에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쓰였습니다. 수요는 극히 제한적이겠지만, 제 브런치 정체성이 그렇습니다. 대중 교양과 전문 학술 자료 사이 그 어딘가에, 누군가는 써야했고 또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자료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굳이 씁니다.
이 글은 먼저 ① 법철학사를 가볍게 개관합니다. 고중세는 현대적 의의를 갖는 것만 추려서 간결하게, 본격적인 서술은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기간에 해당하는 법철학에 대해 이뤄질 것입니다. 그 다음 말미에 ② 법철학 입문에 적절한 도서와 필수적인 고전을 추천하겠습니다. 따라서 먼저 법철학사에 대한 배경지식을 쌓고, 어떤 법철학의 어떤 측면을 더 알고 싶은지에 따라 본인이 정보를 취사선택하시면 되겠습니다.
원시 신화 시대
서양사를 기준으로, 기원전 7세기 이전 사람들은 물리적 자연의 변화가 어떤 규칙성을 지니는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단지 우발적이고 때때로 당황스러운 것(ἀμηχανία)이었습니다. 이런 세계를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화하려 시도한 결과로 발생한 것이 '신화적 네러티브'입니다. 그들은 이 신화적 세계관의 논리 속에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막강한 힘에 순종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자연의 막강한 힘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강력한 권위를 가졌습니다. 이 막강한 자연과 직접 소통하는 제사장이 자연의 권위를 '빌려서' 자신이 꾸리는 공동체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냈음도 당연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의 말이 곧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이자 법 그 자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원시 고대에 '법'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화 시대는 '과학'의 등장으로 끝이 났습니다. '과학'은 사람들이 신들의 무작위스러운 장난처럼 보이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규칙성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가령 음력 초하루와 보름달에는 항상 조수 간만의 차가 최대가 된다는 점을 발견한 사람들은 단순한 신화적 설명을 넘어서 그 규칙성 자체를 합리적으로 납득하려 다양한 가설을 고안하기 시작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제안된 가설들이 그들이 관찰한 또 다른 자연의 다양한 규칙성들과 체계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복잡해지고 발전되면 그게 원시적인 형태의 '과학'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연의 변화에서 관찰되는 일정한 패턴, 이것을 이성적으로 소화하려는 노력이 자연에 일종의 '(과학) 법칙'이 있다는 아이디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법칙'은 세계의 근본적인 질서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들도 이 '법칙'에 따라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 의문이 등장한 최초의 순간이 법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법이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으로 '자연에 내재된 법칙 그 자체'여야 한다는 답변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법철학
법철학에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은 초기 법철학의 역사는 따라서 자연법론의 역사와 동일한 것임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일관되고 체계적인 자연법론의 발전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 동안, 그래서 도대체 이 '자연의 법칙'이 무엇인지에 대해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법철학 : 아리스토텔레스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찰흙으로 무언가를 만든다고 생각해봅시다. 주제는 자유입니다. 이때 나는 찰흙으로 '자동차'를 만들기로 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거의 다 만들었을 때쯤 미술 선생님이 와서 묻습니다. "이건 정체가 뭐니?" 그러면 이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아, 이것은 자동차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년)는 만물은 형상(eidos)와 질료(hyle)를 갖는다고 봤습니다. 질료는 재료에 해당합니다. 형상은 본질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내가 만든 '찰흙 자동차'에서 '찰흙'은 질료, '자동차'는 형상에 해당합니다. 만약 30명의 반 아이들이 모두 저마다 '찰흙 자동차'를 만든다면, 그 '찰흙 자동차'에는 '자동차'이라는 보편자(universalia in re)가 내재합니다. 각자 만든 찰흙 자동차의 모양은 제각각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조형물의 '자동차' 모형으로서의 성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라는 성질 내지는 본질이 제각기 다른 찰흙 자동차에 보편적으로 내재한다는 의미에서 '보편자'입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형상과 질료만으로는, 사물의 '존재'는 설명할 수 있지만 '변화'까지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물의 변화에는 4가지 원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질료인, 형상인, 운동인, 목적인이 그것입니다. 모든 변화는 원인이 필요하므로 운동인이 필요하고, 그 변화가 무작위는 아니고 무언가 '목적'을 지향하므로 목적인이 요구됩니다. 가령 도토리의 운동인은 물과 햇빛입니다. 목적인은 아주 파릇파릇하고 건강하게 도토리가 잘 열리는 참나무일 것입니다.
이 모든 사물에는 지향하는 '목적(telos)'이 있다는 발상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 법, 국가에도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목적은 행복(eudaimonia)입니다. 술 마시면 나오는 도파민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잘 수양한 뒤 그것에 합치되도록 탁월하게 잘 살아서 덕(arete)스럽게 되었을 때의 행복을 말합니다. 국가나 법이 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꾸려져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법은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도록 좋은 품성을 길러주는 도구입니다. 이 좋은 품성에는 도덕적으로 사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법과 도덕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법에는 보편타당한 측면과 때에 따라 임시변통으로 바뀌는 측면이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자를 자연법으로 후자를 실정법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면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바로 그의 정의론입니다. 그는 정의(dikaion)을 일반적 정의와 특수적 정의로 구분했습니다. 일반적 정의는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의 합법성을 의미합니다. 특수적 정의에는 배분적 정의, 시정적 정의, 교환적 정의가 있습니다. 배분적 정의는 부, 권력, 책임의 분배에 있어서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제대로 주는 것입니다. 그럼 그 각자의 몫은 뭘까요? 이것은 각자 자신의 품행을 덕에 잘 일치시켜 발휘한 탁월함(Würdigkeit)을 기준으로 상응하는 몫을 나누어준 기하학적 평등을 의미합니다. 시정적 정의는 불법에 대한 배상원리, 교환적 정의는 거래나 교환에서 통용되는 산술적 차원의 원리를 말합니다.
앞으로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후대 철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눈여겨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중세의 법철학 :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년)는 스토아학파나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법을 영원법(lex arterna), 자연법(lex naturalis), 실정법(lex positiva)으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이 아퀴나스에게 영원법은 신이 만물에 관해 영구적으로 세운 계획으로 그것들의 존재법칙이자 그 활동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런 점은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드러냅니다. 다만 아퀴나스는 이때 인간은 원죄로 인해 영원법을 직접 인식할 수는 없고 신의 계시나 성서의 말씀, 즉 신앙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자연법은 계시나 성서에 암시된 영구법을 인간이 이성으로 소화하여 인식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법은 만물의 존재법칙과 목적을 이성적으로 이해한 것으로, 자연법의 실질적인 내용은 사물의 본성(natura rei)이 됩니다. 가령 성욕과 번식욕을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혼인과 양육에 관한 규범들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부적인 자연법의 내용은 유동적이지만, 자연법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불변합니다.
실정법은 군주가 공동선을 위해 자연법을 구체화하고 보충하여 제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실정법이 자연법에 위배되면 법의 타락(legis corruptio)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효력이 상실되는 것은 아니고, 부당한 실정법이라도 어쨌건 공동선과 질서유지라는 더 고차원적인 선에 기여하고 있는 한 복종할 의무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는 법이라면 저항권을 인정할 여지도 있다고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