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입문의 모든 것
근대의 법철학 : 오스틴
오스틴(John Austin, 1790~1859년)은 최근 법철학계에서 홉스와 벤담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오랜 기간 영국 법실증주의의 창시자로 평가받아왔습니다. 그렇게 인정받는 다양한 까닭이 있지만, 무엇보다 오스틴이 일군 가장 큰 학문적 성과인 '법명령설'을 뚜렷하게 주장했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즉 오스틴에 따르면 법이란 주권자의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주권자는 누구일까요. 그전에 주권이 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주권이란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법, 종교, 문화 심지어 도덕으로부터도 자유롭게, 그 자체가 자신의 주권이 미치는 모든 영역 하에서 옳고 그름의 최종적 판단 기준이고 그럴 수 있어야만 주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인은 단순히 입법만 마음대로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까지 일본인의 간섭을 받아야 했는데, 그건 주권이 침탈당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 예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좀 더 아카데믹하게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근대 주권 개념의 원류인 장 보댕(Jean Bodin, 1530~1596년)의 ≪국가에 관한 6권의 책(Les Six Livres de la République)≫에 등장하는 주권 개념을 살펴보면, 보댕이 주권을 설명하면서 국가를 가정(household)에 반복적으로 비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보댕은 가부장제 하의 가장의 권위를 국가 차원으로 확대한 것으로서 주권을 이해하고 설명했습니다. 집안에서 가장이 식구들을 보듬으며 질서의 수호를 맡고 안팎의 모든 결정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지듯, 국가에도 주권자라는 게 있어서 가장 같은 역할을 해야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오스틴의 맥락에서도 주권에 대한 이해는 계속 이어져서, 그의 저작에서 주권자는 독립된 정치 체제 내에서 관행적으로 복종되는 최고 상위자로 간주됩니다. 그건 군주가 될 수도 있고, 의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하간 주권자가 명령하는 행위가 법의 본질이라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아이디어입니다. 물론 주권자가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 소리나 내지른다고 다 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범자 '전체'를 대상으로 일정한 행위를 강제하거나 금지하는 '일반명령(general command)'만이 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권자는 법이 될 수 있는 명령을 발화하려면 그 발화 당시에 수범자 중 누군가를 타깃 삼아서는 안 됩니다. 가령 주권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을 특정해서 그의 재산만 뺏어오는 명령이라면, 이건 법의 속성을 갖지 않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면 법명령설도 이미 홉스 등에게서부터 관찰되는 것이지만, 일반명령도 오스틴의 생각이 아니라 당대 법학에 관심 있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퍼져있던 생각이긴 합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오스틴은 법의 본질이란 명령이라고 봤고, 그 명령을 어길 시에 제재(sanction)가 따르기 때문에, 그런 형벌이 두려워서 사람들이 법에 복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오스틴의 논리 하에서는 형벌이 없는 명령은 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건 실정법이 아니라 실정 도덕(positive morality)에 불과합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국제법입니다. 오스틴에 따르면 국제법은 주권국가가 어긴다고 해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법규범성'을 갖는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법명령설의 맥락에서 그는 '있는 법(de lege lata)'과 '있어야 할 법(e lege ferenda)'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있는 법'이 '있어야 할 법'에 위배되더라도, 그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권자가 수범자로서 보기에 '부당한' 명령을 강요한다고 해서, 그것의 실효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스틴이 신법의 존재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신법이 실정법을 깨트리진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이 법명령설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법명령설 자체는 옳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의미를 과장해서 명령이 곧 법의 충분조건이라고 오해하면 문제가 시작됩니다. 살인을 하면 징역 10년인데, A가 B를 징역 10년을 살아도 죽이고 싶어 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A는 살인을 해도 될까요? 기꺼이 순순히 감옥에 들어갈 용의가 있어서 법을 어기고 B를 죽였다면, 법명령설 하에서는 이 사람에게 징역형을 내리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도덕적 비난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도덕적 직관으로는 A에게 여전히 '나쁜 살인마'라는 비난을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렇게 법명령설은 자칫 법을 '가언명령'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명령은 나에게 이득이 되는 한에서 따르는 것이고, 명령 위반에 수반되는 제재가 그것을 위반했을 때 얻는 이득보다 작을 때는 주저 없이 명령 위반을 결심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합니다. 이건 명백히 법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수준에서 건전한 법명령설 독해는, '명령과 제재가 법의 필요조건이다'는 정도로 한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명제논리의 선언지 제거를 알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명령이란 정언명령 아니면 가언명령인데, 가언명령이 아니라면 법은 정언명령이란 뜻인가?" 답변하자면, 논리적으로는 그렇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칼 엥겔스는 그래서 법은 정언명령이라고 봤고, 제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다른 법철학자들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법과 도덕을 엄중하게 구분지어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여기에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법이 정언명령이라면 수범자의 동기까지 구속하게 되는데, 법과 도덕을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 행위자의 동기를 구속하는 건 도덕이어야 하지 법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법을 꼭 가언명령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법경제학은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는 경제학의 인간관을 차용해서 법학의 논리를 재구성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법을 '이익에 따라 어기려면 어길 수도 있는 것'으로 취급하곤 합니다. 물론 법경제학이 법명령설을 가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고, 법경제학의 목표는 사회적 후생을 극대화하면서도 '법을 어길 수도 있는' 여지를 최적으로 줄이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근대의 법철학 : 포이어바흐
파울 요한 안젤름 폰 포이어바흐(Paul Johann Anselm von Feuerbach, 1775~1833년)는 헷갈립니다. 왜냐, 이 집안엔 똑같은 이름의 유명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일단 가장 유명한 건 이 사람의 넷째이자 막내아들인 루드비히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년)입니다. 마르크스가 자신이 인류학적 유물론을 고안할 때 영향을 받았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
이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둘째 아들인 카를 포이어바흐(Karl Wilhelm Feuerbach, 1800~1834년)가 수학에서 등장하는 포이어바흐 원, 즉 구점원(nine-point circle)에 관한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손자가 안젤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년)로 19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독일 인상파 화가입니다. 이보다는 덜 하겠으나 그 외에도 유명한 인물들이 이 집안에 워낙 많은데 이름이 죄다 '포이어바흐'라서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나름 늘려서 말해도 여전히 이름이 겹칩니다. 제가 소개할 근대 형법학의 아버지인 파울 요한 안젤름 폰 포이어바흐를 나름 줄여서 '안젤름 포이어바흐'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줄이면 이 사람의 증손자이자 독일 인상파 화가인 '안젤름 포이어바흐'와 이름이 똑같아져 버립니다. 그래서 법학만 공부한 사람이 미술관에서 가서 '포이어바흐'라는 이름을 보면 "어? 이 사람 그림도 그렸어?"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ChatGPT한테 물어보면, 얘도 헷갈려하고 이상한 소리 합니다. 특히 파울 요한 안젤름 폰 포이어바흐와 그 아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를 마구 섞어서 설명해 대는데,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는 죄다 그냥 '포이어바흐'라고만 지칭하면서 설명하고 있으니 분별없이 학습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지금부터는 제가 '포이어바흐'라고 하면 근대 형법학의 아버지인 파울 요한 안젤름 폰 포이어바흐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가족과 이름을 길게 소개한 것에 비해서 이 사람의 업적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할 것이 없습니다. 법철학보다는 법학에 더 많이 기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이긴 합니다. 객관적 자연법의 가능성을 부정하면서도, 칸트의 윤리학에 기대어 인간의 윤리적 자율성으로부터 함부로 처분될 수 없는 인간의 주관적 권리(기본권과 인권)는 인정한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이와 관련해 포이어바흐는 의무의 영역인 도덕이 아니라 이 권리의 문제가 법이 다뤄야 할 문제라고 봤습니다. 그렇게 법의 본질적 요소로 강제가능성을 지목하면서 도덕과 강하게 구분 지으려고 했는데, 이런 점들은 대체로 이미 칸트가 다 언급한 사항들입니다.
보다 더 눈에 띄는 포이어바흐의 업적은 형법학에서 일반예방이론을 처음 주창했다는 것입니다. 칸트에게서 형벌이란 그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응당 마땅히 취해져야 할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포이어바흐는 이와 달리 형벌이란 수범자에게 심리적 위하력을 부과해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는 포이어바흐의 현실주의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법률 없이 범죄 없다(nulla crimen sine lege)"와 "법률 없이 형벌 없다(nulla poeba sine lege)"로 표지 되는 죄형법정주의 원칙도 포이어바흐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습니다. 이 엄격한 죄형법정주의 원칙 아래 법해석에 있어서 법관은 법률의 객관적 목적이나 입법자의 의지를 따져서는 안 되고 오직 법률의 자구에만 구속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전개했습니다. 이런 점들은 근대 형법학에 있어서 말 그대로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름은 꼭 알아둬야 할 법학자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