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철학 입문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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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법철학 : 사비니의 역사법학
사비니(Friedrich Carl von Savigny, 1779~1861년)에게 법은 이성의 산물이 아닙니다. 현실을 되돌아 보면, 법이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의 이성에서 샘솟아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이 펑- 탄생한 게 아닙니다. 법이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한 민족이 오랜기간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발전시킨 결과물입니다. 태초의 미약한 습속(Sitte)와 민속신앙(Volksglaube)이 장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복잡해지고 발전되어 법학(Jurisprudenz)으로 거듭난 것이기에, 법이란 고유한 민족혼(Volksseele)을 반영한 것이자 반영해야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사비니에게는 모든 민족들에게 보편타당한 초월적인 자연법 같은 건 없습니다. 입법자들의 내면 깊은 곳에 깃든 그들의 민족적 신념과 감수성이 민족적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여 법을 만들고 발전시켜나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법철학 : 헤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년)과 이후 신헤겔주의자들이 독일의 법학 및 법철학 그리고 그것을 계수한 한국의 법학 및 실제 대법원 판례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합니다. 그렇기에 악명 높은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헤겔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지면에서는 필요한 부분만 제한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헤겔의 철학은 역사적 현실에서 일어난 일들에 착안합니다. 칸트가 '뇌피셜'로만 철학을 했다면, 헤겔은 자신의 철학을 실제 역사의 발전 과정에 대응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역사란 사비니와 같은 한 민족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성을 가진 지성체의 전체 집단, 즉 인류의 역사에 대응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살펴보기 위해서는 1817년 헤겔의 후기 저작인 ≪엔치클로페디(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를 살펴봐야 합니다.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Absoluter Geist)이 자기자신을 드러내고 인식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이 절대정신이 무엇이냐는 건데, 무어라 비유를 찾기가 난감합니다. 논리학이자, 형이상학이자, 자연 그 자체이자, 인간의 이성이면서 그 이성의 모든 산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각자 모두 절대정신이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밟아가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철학 개념 안에서 설명되니까 난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헤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여튼 절대정신이라는 게 있다!' 정도로 묻어두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피히테부터 셸링에 이르는 헤겔 이전의 독일 관념론을 처음부터 쫓아갈 것이 아니라면, 그 절대정신에 대해 어렴풋이 감이 잡히는 것은 헤겔 철학의 전체 체계를 이해하고 난 다음인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지면에서는 헤겔 철학의 전체 체계를 서술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잠정적으로 '절대정신'이라는 것을 그저 있다고 받아들이고 갑시다. 다른 이름을 가진 정신들도 등장할텐데, 그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헤겔 철학에서 정신은 주관정신(Subjektiver Geist), 객관정신(Objektiver Geist), 절대정신(Absoluter Geist) 순서로 이행합니다. 궁극적인 형태인 절대정신은 예술과 종교를 거쳐 철학에서 자기자신을 완전히 인식하게 됩니다. LEET 언어이해나 수능 국어 비문학 지문에 익숙하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헤겔의 법철학은 객관정신의 단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객관정신은 절대정신처럼 법과 도덕을 거쳐 인륜성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인륜성 개념이 헤겔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데, 객관정신이 인륜성 속에서 완성되는 과정은 가정, 시민사회, 국가로 이행하는 세 인륜적 실체를 거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선 헤겔에게 법(권리, Recht)은 어떤 의미인지부터 살펴봅시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각자 자유로이 행동하면 사실상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법이 필요합니다. 이 법의 기능은 각자의 권리를 설정해서 사람들이 더이상 다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각 개인들이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한 첫번째 스텝입니다. '진정으로'라니, 그럼 아직은 '가짜 자유'라는 건가요? 네, 가짜 자유입니다.
객관정신은 진정한 자유를 찾아 법에서 도덕(Moralität)으로 층위를 높여갑니다. 헤겔에게 도덕은 각자 양심에 따라 자신의 의지(개별의지)를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원칙(보편의지)에 일치시키려는 의무의 수행입니다. 그렇지만 각 개인의 주관적 양심에만 따라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온전히 질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위태롭고 불완전합니다.
따라서 객관정신은 이 개인적인 차원의 도덕에서 한 차례 더 층위를 높여 제대로 돌아가는 잘 조직된 사회에 알맞도록 꾸며진 도덕규범의 집합, 즉 인륜성(Sittlichkeit)으로 이행합니다. 이 인륜성은 개인적인 양심에 기초한 도덕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도덕의무를 사회 속에서 구체화하고 객관화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진정한 자유의 실현을 추구하는 객관정신은 법의 단계에서 외형적 형식을 부여받고, 도덕의 단계에서 보편의지와 내면적 조화를 이루며, 인륜성 속에서 최종적으로 보편성과 객관성을 획득하고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객관정신이 인륜성 속에서 완성되는 과정은 가족(Familie), 시민사회(Bürgerliche Gesellschaft), 국가(Staat)라는 세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가족은 자연적 사랑과 친밀성으로 모인 윤리적 공동체이고, 시민사회는 가족을 넘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각 개인이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공동의 이익을 실현하는 단계입니다. 국가는 인륜성의 가장 높은 구현 형태로 여기에 이르러서 개별의지와 보편의지는 일치되게 됩니다. 즉 객관의지가 위태롭거나 불완전함이 없이 확고하고 보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제야 우리는 법에 복종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과 국가는 같은 객관정신이 현실에 드러난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니 최상의 인륜성의 구현으로서의 국가가 갖춘 법은 이미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완전한 것으로 개별의지를 보편의지에 맞추어 살면 자연히 도덕적인 삶인 동시에 합법적인 삶도 됩니다. 즉 법을 준수하는 것이 개별의지를 보편의지에 일치시키는 것이며, 개인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객관정신과 개인이 혼동되고, 자유라는 말도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답변하자면 헤겔 철학에서 오직 유일한 주체는 절대정신이기 때문인데, 이것을 충분히 설명하려면 결국 헤겔 철학의 전반, 나아가서는 독일 관념론 전체를 다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본 글의 취지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생략해야 하겠습니다. 헤겔의 법철학이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유감입니다. 이후에 소개될 신헤겔주의자들의 법철학을 살펴보면서 헤겔을 복기해보면 그나마 조금은 더 이해가 될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